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내왕했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에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부곡리가 5품을 넘을 수 없었지만 특별히 허통(許通)되어 장군에 올랐다. 이후 승진을 거듭해 1294년(충렬왕 20) 12월에 우승지가 되었고, 1296년 1월에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 해에 세자(뒤의 忠宣王)의 요청에 의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었으며, 11월 조인규(趙仁規) · 인후(印侯)와 함께 원나라에 파견되어 충렬왕의 전위표(傳位表)를 전달하였다. 1298년 1월 충선왕이 즉위하자 광정원부사(光政院副使)로서 참지기무(參知機務)를 겸했고, 곧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295년(충렬 25) 4월 인후 등에 의해 한희유 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원나라에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8월 귀국하였다. 1299년에 차신(車信) · 최유엄(崔有渰) · 오인영(吳仁永) · 유복화(劉福和) · 홍선(洪詵)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당시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선왕의 환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1307년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 옹립의 공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도첨의찬성사 ·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로 중용되었다. 이 때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받아 개명하였다. 1310년(충선 복위 2) 8월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9월 도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1313년 3월 다시 정승에 올라 1321년(충숙왕 8)까지 재임하였다.
1320년에 원나라에서 충선왕이 고려인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참소를 받아 티베트〔吐蕃〕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4월 충숙왕 역시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 소환되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1322년(충숙 9) 8월 그곳에서 권한공(權漢功) · 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심왕(瀋王) 왕고(王暠)와 결탁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오잠(吳潛)과 함께 고려에 원나라의 내지(內地)에 설치된 행성(行省)을 두자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벌였으며, 충숙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무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이 모두 실패하고 1325년 5월 충숙왕이 환국하자, 처벌이 두려워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1329년(충숙 16) 6월 원나라에서 죽었다. 말년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 때문에 『고려사(高麗史)』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되었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