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 때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충렬왕이 즉위한 후 감찰잡단(監察雜端)으로 발탁하였다. 1279년(충렬왕 5) 감찰시승(監察侍丞)으로 시무에 대해 직언하다 잠시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당하였다.
1287년(충렬왕 13) 전법총랑(典法摠郎),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고, 1291년(충렬왕 17) 부밀직사사(副密直司使), 감찰대부(監察大夫), 이듬해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293년(충렬왕 19) 전라도도지휘사(全羅道都指揮使) 등을 역임하였다.
1290년(충렬왕 16) 카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강화도로 피난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최유엄이 나서서 만류하였다. 1297년(충렬왕 23)에는 성절 축하 사신으로, 1299년(충렬왕 25)에는 황태자 탄생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1300년(충렬왕 26) 찬성사(贊成事)로 있을 때는 원나라 황제가 고려 신료 중 현명한 자를 보내올 것을 요청하자 이에 응해 파견되었다. 이때 정동행성(征東行省)에 파견되었던 활리길사(闊里吉思)가 고려의 노비 제도를 혁파하려고 하였는데, 최유엄이 옛 법에 따를 것을 주청하여 황제가 이를 승인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이 공을 인정하여 녹권(錄券)을 하사하였다. 1307년(충렬왕 33)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원나라 무종(武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파견되었다.
충렬왕이 세자를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후사로 책립하려 할 때 반대하여 왕의 뜻을 굽히게 하였다. 훗날 충선왕이 복위해서는 최유엄을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 대령군(大寧君)[대령부원군(大寧府院君)]으로 임명하고 공신 칭호를 하사하였다.
충선왕(忠宣王) 재위 때에는 관료군의 최고위직에 있었으나, 이미 나이가 많아 왕이 5일에 한 번씩 도당(都堂)에 나와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에도 다시 정승(政丞)에 기용되었다. 1324년(충숙왕 11)에는 86세의 고령으로 다시 원나라에 파견되어 유배된 충선왕을 위한 구명 활동을 펼쳤다. 또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에 행성(行省)을 두어 내지(內地)와 같게 하려는 논의가 일고 있었는데, 이를 저지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삼한(三韓)을 보전하게 한 분은 최 시중(侍中)이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실린 그의 열전에는 그를 가리켜 “4대에 걸쳐 벼슬을 하고 나라의 원로가 되어 주1가 의지하고 존중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