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은 고려 전기에 문하시랑평장사, 도병마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984년(성종 3)에 태어나 1068년(문종 22)에 사망했다. 문장에 능하여 1013년(현종 4) 국사수찬관으로서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을 편찬했다. 문종 즉위 후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을 정리했고 서북 주·진의 공역 금지를 청하고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 격인 구재학당을 세워 교육과 인재양성에 힘썼다. 교육을 통해 국가의 대계를 세움으로써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다.
1005년(목종 8) 최항(崔沆)을 지공거(知貢擧)로 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에 임명되었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수찬관(修撰官)이 되어 황주량(黃周亮) 등과 함께 태조(太祖)에서 목종(穆宗)에 이르는 『칠대실록(七代實錄)』을 편찬하였다.
그 뒤 우보궐(右輔闕)· 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 등을 역임하고, 1025년(현종 16)에 한림학사(翰林學士)·내사사인(內史舍人)·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1026년(현종 17)에는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고 이어서 급사중(給事中)·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 등을 지냈다.
1033년(덕종 2)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說苑)』 육정(六正)·육사(六邪)의 글과 한(漢)나라에서 자사(刺史)에게 준 6조(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刑部尙書)·중추사(中樞使)로 전임되었다.
1035년(정종 1)에 다시 지공거가 되었고 1037년(정종 3)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에 임명되어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041년(정종 7)에는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가 되어 영원진(寧遠鎭)과 평로진(平虜鎭)에 성을 쌓고 14개의 보루를 설치하고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다. 1043년(정종 9)에는 수사도(守司徒)·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을 더하였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에 올라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고 곧 수태보(守太保)를 더하였다. 1050년(문종 4)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부(守太傅)가에 올랐으며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에 책봉되었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면서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도 건의하였다.
1053년(문종 7)에 70세가 되자 사직을 청하였는데, 문종은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안석 및 지팡이 [궤장(几杖)]를 하사하면서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으로 책봉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사(守太師)와 문하시중(兼門下侍中)을 겸하는 벼슬과 상주국(上柱國)이라는 훈작을 내려주었다. 거듭해서 사직을 요청하자, 1055년(문종 9)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하면서 치사(致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뒷날 내사문하성이 중서문하성으로 개칭되면서 다시 중서령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신호도 여러 차례 덧붙여져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과 인재양성에 힘쓰다가 1068년(문종 22) 9월에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송악산 아래에 학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자, “의관자제(衣冠子弟)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이 무리에 들어가 배웠다.”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을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 등 9개의 방으로 구분 지어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 하였다. 이곳에서는 주2과 주3를 포함한 시부(詩賦)와 사장(詞章) 그리고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에 대비하면서 유학에서 강조하는 인격 도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교육방침은 여름에 피서를 겸해 개경 탄현(炭峴) 밖에 있는 귀법사(歸法寺) 등 산사(山寺)의 승방을 빌려 공부하는 하과(夏課)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자를 교도(敎導)로 삼아 생도들에게 9경과 3사를 주로 가르쳤다. 간혹 저명한 학자나 벼슬에 오른 선배[先進]들이 찾아오면, 생도들과 함께 초에 금을 긋고 시간 내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여 각자의 시(詩)에 등급을 붙이고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한 뒤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때 아이들과 어른들[童冠]은 좌우에 벌려 있으면서 술잔과 안주를 받들었는데, 나오고 물러나는 데 예의가 있었고 장유(長幼)의 질서를 지키며 종일토록 시를 주고받으며 따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사업은 당시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들이 모두 9재의 적(籍)에 이름을 두려고 할 정도였다. 그 학생들은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혹은 ‘최충도(崔冲徒)’라 불렀으며, 뒤에는 그의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고 일컬었다. 또한 학식과 벼슬로 명망 높고 특히 지공거를 지내면서 과거를 주관했던 경험을 가진 유학자들은 문헌공도를 모방해서 개경에 학도[徒]를 세운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문헌공도를 중심으로 한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가 명성을 날리면서, 점차 사학(私學)이 관학(官學)을 압도하고 번창하게 되었다.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유명무실해진 국학(國學)을 대신해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양성에 앞장선 최충(崔沖)은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당시 유학계의 최고 권위자였다. 한국 유학사에서도 그의 위상이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최승로(崔承老)에서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구재학당의 명칭 가운데 『중용(中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1·성명(誠明) 등이 보이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유학 사상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이이(李珥)와 같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그가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만 힘쓰고 불교 문자를 지었다는 점을 문제 삼아 문묘종사(文廟從祀)에서 배제하였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圓空國師勝妙之塔碑)와 천안의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가 남아 있다.
정종(靖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宣宗)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