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언(嘉言). 초명은 최사순(崔思順). 문하시중을 지낸 최충(崔冲)의 손자이며, 상서령을 지낸 최유길(崔惟吉)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잘했으며,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왕이 최사추가 명문가의 아들로 학문에 해박하고 견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내시(內侍)로 삼아 문답을 해보니, 대답이 왕의 뜻에 맞아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선종 때 전중소감(殿中少監)과 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를 역임하였고, 1088년(선종 5)에는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하였다.
그 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는데, 1092년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고 요나라의 사신 왕정(王鼎)이 오자 그 관반(館伴: 國賓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매일 밤 홀로 앉아 글을 짓는다는 말을 왕정이 듣고 꾀를 내어 최사추의 글을 가져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이 글은 임금에게 간하기 위해 올린 소로, 그 내용은 요나라가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군사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과 송나라가 남하(南夏)를 치는 일을 말한 것이다. 왕은 빈객 접대에 능한 최사추를 가상히 여겨 손수 조서(詔書)를 써서 표창하고, 뒤 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하였다.
1094년(헌종 즉위년)에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事左散騎常侍)가 되었고, 이듬 해 이부상서 지중추원사(吏部尙書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守司空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며, 뒤 이어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다.
1097년(숙종 2)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 서경유수사(中書侍郎平章事判刑部事西京留守事), 1100년에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이듬 해에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자 윤관(尹瓘) 등과 궁궐터를 살펴 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103년에는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 그 해 반역을 도모한 대장군 고문개(高文蓋)·장홍점(張洪占)·이궁제(李弓濟), 장군 김자진(金子珍) 등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의 호를 받았다.
1104년에 수태보(守太保)가 되었으나,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예종 때 수태사 중서령(守太師中書令)이 더해져서 치사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최사추의 사위였는데,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태자를 낳자 추성봉국공신 대령군 개국후(推誠奉國功臣大寧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