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추 ()

최사추묘지
최사추묘지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에, 문하시랑평장사, 수태위 판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가언(嘉言)
시호
충경(忠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36년(정종 2)
사망 연도
1115년(예종 10)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전중소감|어사대부|문하시랑평장사|문하시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 전기에, 문하시랑평장사, 수태위 판이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언(嘉言). 초명은 최사순(崔思順). 문하시중을 지낸 최충(崔冲)의 손자이며, 상서령을 지낸 최유길(崔惟吉)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잘했으며,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왕이 최사추가 명문가의 아들로 학문에 해박하고 견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내시(內侍)로 삼아 문답을 해보니, 대답이 왕의 뜻에 맞아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선종 때 전중소감(殿中少監)과 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를 역임하였고, 1088년(선종 5)에는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하였다.

그 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는데, 1092년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고 요나라의 사신 왕정(王鼎)이 오자 그 관반(館伴: 國賓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매일 밤 홀로 앉아 글을 짓는다는 말을 왕정이 듣고 꾀를 내어 최사추의 글을 가져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이 글은 임금에게 간하기 위해 올린 소로, 그 내용은 요나라가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군사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과 송나라가 남하(南夏)를 치는 일을 말한 것이다. 왕은 빈객 접대에 능한 최사추를 가상히 여겨 손수 조서(詔書)를 써서 표창하고, 뒤 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하였다.

1094년(헌종 즉위년)에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同知中樞院事左散騎常侍)가 되었고, 이듬 해 이부상서 지중추원사(吏部尙書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守司空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며, 뒤 이어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다.

1097년(숙종 2)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 서경유수사(中書侍郎平章事判刑部事西京留守事), 1100년에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이듬 해에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자 윤관(尹瓘) 등과 궁궐터를 살펴 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103년에는 수태위 판이부사(守太尉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 그 해 반역을 도모한 대장군 고문개(高文蓋)·장홍점(張洪占)·이궁제(李弓濟), 장군 김자진(金子珍) 등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의 호를 받았다.

1104년에 수태보(守太保)가 되었으나,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예종 때 수태사 중서령(守太師中書令)이 더해져서 치사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최사추의 사위였는데,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비가 되어 태자를 낳자 추성봉국공신 대령군 개국후(推誠奉國功臣大寧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