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총은 고려 전기 중서사인, 어사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추충공신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숙종 때 송에 사신으로 가서 『태평어람』과 『신의보구방』을 얻어서 돌아왔으며, 상서좌승·추밀원부사·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예종 때는 지추밀원사·어사대부·동북면병마사 등을 지내고,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여 구성(九城)을 쌓고 협모동덕치원공신과 양구진국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뒤 여진에 패하고 구성을 반환하면서 관직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다시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 지공거,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추충공신 등에 올랐다.
본관은 해주(海州). 오연총의 가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김함묘지명(金諴墓誌銘)」에 따르면 김함(金諴)이 자신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복양(濮陽) 오정(吳頲)의 외손이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오연총을 자신의 외삼촌[母弟]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오연총의 아버지가 상서우복야를 지낸 오정(吳頲)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 오연총 열전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충선왕(忠宣王)이 1298년에 내린 즉위교서(卽位敎書)에서 공신 자손의 서용(敍用)을 밝히면서 ‘오연총에게도 친가·외가의 현손(玄孫) 가운데 1명에게 첫 벼슬을 허락한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오연총의 후손은 충선왕 때까지 어떤 형태로든지 이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해서 기거랑(起居郞)·병부낭중(兵部郞中)에 올랐다. 1096년(숙종 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00년(숙종 5)에는 시랑(侍郞)에 올라 상서(尙書) 왕하(王嘏)와 함께 송나라 휘종(徽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에 『태평어람(太平御覽)』 1천 권과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 등을 얻어서 돌아왔다. 그 공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으나, 스스로 외직(外職)을 원해 전주목사(全州牧使)가 되었다.
1104년(숙종 9)에는 전주목사로 있으면서 최상의 고과 등급을 얻고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형부시랑(刑部侍郎)·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올랐다가 상서좌승(尙書左承)·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권지추밀원부사(權知樞密院副使)에 올라 숙종의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 행차를 호종하였으며,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랐다.
1105년(숙종 10)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비서감(秘書監)·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랐다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와 지행영병마사(兼知行營兵馬使)를 겸하였다.
1106년(예종 1)에는 왕으로부터 부모가 70세 이상인 독자, 3·4명의 군인을 둔 집에서 1명, 재추(宰樞)의 자제 가운데 자원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징집의 면제 등을 허락 받으면서 신기군(神騎軍)을 편성하였다. 또한 문덕전(文德殿)에서 왕명으로 윤관(尹瓘)과 함께 강경(講經)에 나섰다가 의대(衣帶)를 하사 받았으며, 뒤이어 검교사도(檢校司徒)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참위설(讖緯說)을 내세워 서경(西京)에 용언궁(龍堰宮)을 세우고 왕이 순행(巡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자, 오연총은 홀로 그것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정 손실만 커질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 주장이 이듬해에 평장사 최홍사(崔弘嗣)를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었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반대하였지만, 예종은 끝내 최홍사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1107년(예종 2) 12월에는 17만 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원수(元帥) 윤관과 함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나서서 큰 승리를 거두고 새로 개척한 땅에 9성(九城)을 쌓았다. 그 공으로 이듬해에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으로 책봉되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여진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병마부원수(兵馬副元帥)의 부월(鈇鉞)을 가지고 출전하여 웅주성(雄州城: 현, 함경남도 길주군)을 구원하고 돌아왔으며, 이 공으로 다시 양구진국공신(壤寇鎭國功臣)·수사도(守司徒)·연영전대학사(延英殿大學士)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1109년(예종 4)에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로 부임하여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지만, 여진이 포위하고 있던 길주성(吉州城)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크게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오연총은 장(狀)을 갖추어 스스로 죄를 청하였다. 게다가 윤관과 함께 정주(定州)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 길주성을 구원하러 나섰다가 여진이 화친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평장사 최홍사와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다시 회복되어 1110년(예종 5) 12월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고, 1112년(예종 7) 2월에는 수사도(守司徒)·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임언(林彦)과 함께 을과(乙科) 정지원(鄭之元) 등 3명과 병과(丙科) 6명 등의 진사(進士), 동진사(同進士) 16명, 명경업(明經業) 3명을 선발하였다. 이때 선발된 진사로는 정지원, 곧 정지상(鄭之常) 이외에도 문공유(文公裕)와 최유청(崔惟淸) 그리고 권적(權適) 등이 확인된다. 오연총은 같은 해 9월에 또한 이위(李瑋)와 함께 문하시랑(門下侍郞)·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1113년(예종 8)에는 수태위(守太尉)·판예병부사(判禮兵部事)·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가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봉해졌다. 그리고 1116년(예종 11)에는 수태위(守太尉)에 임명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그는 협모동덕치원공신과 양구진국공신, 추충공신 등 살아서 이미 세 차례나 공신에 책봉되었다. 또한 충선왕은 공신의 자손에 대한 서용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의 친가·외가의 현손 가운데 1명에게 첫 벼슬을 허락한다고 밝혔다. 조선에서는 1583년(선조 16)에 함경도 경성에서 그를 기릴 목적으로 사당을 세운 바 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935년 무렵에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로 옮겨서 덕산사(德山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