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1096년(숙종 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098년 기거랑(起居郎)이 되고 뒤이어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었다. 1100년에는 시랑(侍郞)으로서 상서(尙書) 왕하(王嘏)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휘종(徽宗)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이듬해 송나라에서 『태평어람(太平御覽)』 1,000권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다. 그러나 외직(外職)을 원해 전주목사(全州牧使)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치적을 쌓자 1104년 추밀원좌승선 형부시랑 지어사대사(樞密院左承宣刑部侍郎知御史臺事)가 되었다가 뒤이어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尙書左承翰林侍講學士)가 되었다.
문종(文宗)이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에 행차할 때 권지추밀원부사(權知樞密院副使)로 호종해 추밀원부사 한림학사(樞密院副使翰林學士)에 올랐다. 1105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동지추밀원사 비서감 한림학사 승지(同知樞密院事秘書監翰林學士承旨)가 되고, 뒤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다시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兼知行營兵馬使)가 되었다가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에 올랐다.
1106년(예종 1)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로서 여진정벌(女眞征伐)의 신기군(神騎軍)을 편성함에 있어 부모의 나이 70세 이상인 독자, 한 집에서 3·4명이 군인이 되는 경우 그 중의 한 사람, 재추(宰樞)의 아들 등은 징집을 면제하자고 청해 이를 허락받았다.
참위설(讖緯說)에 근거해 서경(西京)에 용언궁(龍堰宮)을 세우고 왕이 순행(巡行)하자는 의론이 일자, 오연충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정만 손실하는 것이라 하면서 혼자 반대하였다. 그 해 윤관(尹瓘)과 강경(講經: 지정하여 주는 대목의 경서를 외던 일)을 잘해 의대(衣帶)를 하사받고 검교사도(檢校司徒)에 올랐다.
또한 1107년 부원수(副元帥)로 원수(元帥)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그 공으로 협모동덕치원공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協謀同德致遠功臣尙書左僕射參知政事)가 되었다. 그 뒤 웅주성(雄州城: 지금의 함경남도 길주에 위치)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해 양구진국공신 수사도 연영전대학사(壤寇鎭國功臣守司徒延英殿大學士)가 되었다. 1109년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로서 윤관과 더불어 길주성(吉州城: 지금의 함경남도 길주에 위치)을 포위한 여진을 다시 치다가 실패해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이로 인해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했으나 다시 회복되어 1110년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中書侍郎平章事判三司事), 1112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守司徒判尙書兵部事監修國史), 이듬해에 수태위 판예병부사 상주국(守太尉判禮兵部事上柱國)이 되고 이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1114년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守司徒守太尉監修國史上柱國)이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