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공유는 고려 전기에 충주목부사, 예부상서, 병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문공인의 동생이고, 문극겸의 아버지이다. 그는 이자겸의 집권기에 정치적인 배척을 받았다가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 복직하였다. 문장이 활달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묘지명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유물인 청자다완(靑瓷茶碗)이 묘에서 출토한 것으로 전한다.
문공유는 1102년(숙종 7)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 주관하의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고, 1112년(예종 7) 3월 지공거(知貢擧) 오연총(吳延寵) · 임언(林彦) 주관하의 과거에서 정지원(鄭之元, 鄭之常) · 최유청(崔惟淸) · 권적(權適)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1116년(예종 11)부터 급전녹사(給田錄事), 첨사부주부(詹事府主簿), 합문지후(閤門祗候)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하자, 이자겸과 맞섰던 장인 한안인이 죽게 되었으며, 합문지후(閤門祗候)였던 문공유는 형인 문공인, 가관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이 몰락한 뒤, 그는 1127년(인종 5) 합문지후에 복직되고, 1129년(인종 7)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인종 11)에 문공유는 형인 문공인과는 대조적으로 시어사(侍御史)로서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중(李仲)과 함께,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을 성인(聖人)으로 삼고 천거한 근신(近臣) 김안(金安) · 정지상(鄭知常) · 이중부(李仲孚)와 환자(宦者) 유개(庾開) 및 이들을 추종한 대신들을 배척하라고 요청하였다가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에 문공유는 충의(忠義)로서 탁용(擢用)되어 호부낭중동궁시독사지제고(戶部郎中東宮侍讀事知制誥)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147년(의종 1)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서 우정언(右正言) 정지원(鄭知源)과 함께 시국에 대하여 간언하였다. 1148년(의종 2)에 문공유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 1149년(의종 3)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 시형부상서(試刑部尙書)를 지냈다. 이해 7월 의종(毅宗)은 청연각에서 문공유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후 문공유는 1151년(의종 5) 예부상서(禮部尙書), 1152년(의종 6) 형부상서(刑部尙書) ·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고, 1155년(의종 9)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문공유는 풍채가 당당하고 문장이 활달하였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백학사의 서남쪽 기슭에 묻혔는데, 묘지석과 함께 출토한 것으로 전하는 청자 유물인 전(傳) 문공유 청자다완(靑瓷茶碗)이라는 국보가 있다. 이 다완의 내면은 국화문(菊花文)과 모란당초문(牡丹唐草文)이 가득하게 백토로 역상감이 되었고 외면에는 국화문을 간결하게 배치한 아름다운 청자로서, 초기 상감 청자의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
문공유의 시호(諡號)는 경정(敬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