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이 아우 최충수(崔忠粹)와 더불어 무신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자 권준(權準), 손홍윤(孫洪胤), 권절평(權節平), 손석(孫碩), 권윤(權允), 유삼백(柳森栢), 최혁윤(崔赫尹) 등 친이의민(親李義旼)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였다. 이에 당시 상장군(上將軍)이었던 길인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장군 유광(兪光)· 박공습(朴公襲) 등과 더불어 이에 맞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
길인은 장군 유광·박공습 등과 함께 금군(禁軍)·환관(宦官)·노예 등 약 1천여 명을 끌어 모아 수창궁(壽昌宮) 무기 창고의 병장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지금 최충헌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있으니 앞으로 화가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각자는 힘을 다하여 큰 공을 세우라.”라고 하였다. 길인의 무리는 궁문을 나서서 모래재[沙嶺]를 넘어 개경(開京) 시가로 향하였다.
그러나 최충헌이 정예 군사를 내어 공격하자 길인의 무리는 격파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급박해진 길인은 유광·박공습과 함께 수창궁으로 들어가 궁문을 닫고 저항하였다. 최충헌이 궁궐을 포위하고 백존유(白存儒)가 화공(火攻)을 감행하려고 하자 길인은 궁궐 담을 넘어 도망쳤다. 최충헌이 지휘하던 군사들이 궁궐로 진입하여 살육을 자행하자 유광과 박공습은 자살하였다. 이후 길인은 북산(北山)으로 도피하여 훗날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