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분은 1270년(원종 11) 무인집정자 임유무를 처단하여 무신정권 종식에 공을 세웠으며, 이후 원간섭기에 첨의찬성, 선무장군진변만호, 지도첨의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아버지 송송례와 더불어 임씨무인정권을 붕괴시킨 주역으로서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실행에 옮겼다. 이후 원간섭기에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에 다녀오고 일본원정 준비를 위해 경상도에 도지휘사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전함건조를 실행하였으며, 원나라의 선무장군진변만호에 임명되는 등 충렬왕 측근에서 중요한 정치·군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270년(원종 11) 송송례가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할 때 위사장(衛士長)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송분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삼별초(三別抄)의 신의군(神義軍)을 투입, 아버지 송송례와 함께 정변을 성공시켰고, 이에 의하여 무신정권이 무너졌다.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6월 세자 왕심(王諶: 충렬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호종하였다. 이때 원 황후의 청으로 낙산사(洛山寺)의 관음여의주(觀音如意珠)를 가지고 갔다.
1273년(원종 14) 1월에 대장군(大將軍)으로 원나라 마강(馬絳)과 함께 합포(合浦, 현, 경산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전함을 순시하였다. 이후 좌우서윤(左右庶尹)을 거쳐 1278년(충렬왕 4) 4월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에 다녀왔으며, 1279년(충렬왕 5)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282년(충렬왕 8)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경상도에 내려가 전함을 수리하고, 1285년(충렬왕 11)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경상도조선도지휘사(造船都指揮使)로서 공역(功役)을 크게 일으켜 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심하였다.
1290년(충렬왕 16) 카다안[哈丹]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개경에 남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강화도로 도망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선무장군 진변만호(宣武將軍鎭邊萬戶)가 되고 금패(金牌)를 받았다. 이때 여진(女眞)과 쌀을 밀무역한 죄목으로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첨의시랑(僉議侍郞)·찬성사(贊成事)가 되고,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가 되었으며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 안향(安珦)과 함께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지도첨의사사가 된 뒤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1300년(충렬왕 26)에 우중찬(右中贊)이 되고 추성찬화안사공신(推誠贊化安社功臣)에 봉해졌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303년(충렬왕 29)에는 첨의좌중찬(僉議左中贊)이 되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해졌다. 1318년(충숙왕 5)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양의(良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