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8년(고종 45) 3월 최씨정권(崔氏政權)을 무너뜨린 무오정변(戊午政變)에 낭장(郎將)으로 가담하여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에 올랐다.
김준정권(金俊政權) 하에서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1270년(원종 11)에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서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 및 아들 송분과 함께 권신 임유무(林惟茂)를 죽이고 100년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 아울러 임유무의 무리인 사공(司空) 이응렬(李應烈)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귀양보내고, 서방3번(書房三番)과 조성색(造成色)을 없애고 왕정(王政)을 복고(復古)시켰다.
뒤이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세자 왕심(王諶: 충렬왕(忠烈王))이 몽골에 가자 그를 수행하였다. 1272년(원종 13)에 추밀원부사로 원나라에 가서 전년에 국호를 몽골에서 원(元)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그 해 탐라(耽羅, 현, 제주특별자치도)의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검열하는 한편, 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가 되어 군사를 징발하였다.
1273년(원종 14)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일본원정을 위한 군사를 징발, 보충하는 일을 맡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재추(宰樞)로서 곽자여(郭子璵)와 함께 몽골 풍속인 변발(辮髮)하는 일에 앞장섰다. 찬성사(贊成事)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