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극겸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무신정권 초기인 명종 대에 용호군대장군,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병(德柄)
시호
충숙(忠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122년(예종 17)
사망 연도
1189년(명종 19)
본관
남평(南平)
주요 관직
용호대장군|권판상서이부사
관련 사건
무신 정변
내용 요약

문극겸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 초기인 명종 대에 용호군대장군,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문극겸은 의종 대에 직언을 하여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던 인물이지만, 정중부에서 이의민에 이르는 무신정권하에서도 참지정사, 판호부사, 판병부사 등 고위직을 유지한 문반 관인이다. 문반 재상으로서 대장군, 상장군의 무반직을 겸직하였던 첫 사례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국왕에게 충언을 불사하는 충신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무신 권력자와 혼인의 인연을 맺으면서 무신정권하에서 정치적으로 영달한 인물이라는 측면을 함께 보여 준다.

키워드
정의
고려 후기, 무신정권 초기인 명종 대에 용호군대장군,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문극겸(文克謙)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덕병(德柄)이다. 그는 주3 ·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경정공(敬靖公) 문공유(文公裕)의 아들이다.

주요 활동

문극겸은 큰아버지 문공인(文公仁)주1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된 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다가 의종(毅宗) 때 급제하였다. 그는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주2이 되어서 주4을 자행하던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과, 탐욕을 일삼던 술인(術人) 영의(榮儀) 등을 탄핵하다가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왕 주5의 모함으로 그가 다시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좌천될 상황에, “직언하는 신하를 외관(外官)으로 좌천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다.”라는 유사(有司)주6로 안으로 들어와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고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鄭仲夫의 亂) 때 문극겸도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앞서 좌정언으로 있을 때 백선연을 비롯한 이들의 비행을 탄핵해 좌천된 것이 주7으로 알려져 화를 면했으며, 의종이 거제도로 추방될 때 문극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그는 주14 · 주15이 되어 이공승(李公升)을 비롯하여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무신들이 그에게 고사(故事)를 자문(諮問)하는 것에 응하였으며, 뒤이어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하였다.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이린(李隣)에게 출가시켰다. 그 뒤 문극겸은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군(上將軍)을 겸해 무신정권기에 문신으로 문무를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한편 그는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이어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으며, 1173년(명종 3)에 예부시랑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최시행(崔時幸)을 포함하여 주16 32인을 뽑았다. 1177년(명종 7)에는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염신약(廉信若)과 함께 최기정(崔基靜 · 崔洪胤), 민공규(閔公珪) 등을, 1284년(명종 14)에도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임민비(林民庇)와 함께 금극의(琴克儀 · 琴儀), 조준(趙準) 등을 각각 선발하였다.

1179년(명종 9)에 문극겸은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주8에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로 좌천되었다. 1180년(명종 10)에 그는 주13가 되었고, 이듬해 수태위(守大尉)가 되었으며, 1183년(명종 1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금극의(琴克儀)를 비롯한 진사 31인과 명경(明經) 5인을 선발하였다. 1185년(명종 15)에 그는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 주9이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修國史), 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명종 17)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또한 그는 이의방, 정중부에서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에 이르는 무신정권하에서도 지위를 유지한 주17 관인 중의 1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명종이 시를 짓고 문극겸에게 화답시를 짓도록 하곤 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가 명종과도 친밀감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문극겸은 명종 주10주11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그는 전라남도 나주시 장연서원(長淵書院)에 배향되었고, 충청남도 공주시에 묘소와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사당 유적 고간원지(叩諫院址)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보한집(補閑集)』

단행본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일지사, 1990)
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출판부, 2001)
공주문화원, 『공주 세거 남평문씨 충숙공 문극겸의 사적』(2009)

논문

신수정, 「무신정권과 문극겸」(『역사와실학』 10·11, 역사실학회, 1999)
주석
주1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또는 그 벼슬. 우리말샘

주2

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육품 벼슬. 예종 11년(1116)에 좌습유를 고친 것으로, 뒤에 사보(思補)로 고쳤다가 다시 이것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3

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이품 벼슬. 문종 때 정하였으며 뒤에 지첨의부사로 고쳤다가 다시 지도첨의사, 지문하부사 등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4

위력으로 억압하기도 하고 복덕을 베풀어서 사람을 달래기도 하는 일. 우리말샘

주5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 우리말샘

주6

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던 일. 우리말샘

주7

육정신의 하나. 강직한 신하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8

고려 시대에, 추밀원에 속한 종이품 벼슬. 헌종 1년(1095)에 중추원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9

재상에 버금간다는 뜻으로, ‘어사대부’를 달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0

종묘와 명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1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주12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우리말샘

주13

고려 시대에, 태자부(太子府)에 둔 종이품 벼슬. 충렬왕 3년(1277)에 세자이사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14

고려 시대에, 중추원에 속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 뒤에 우승지ㆍ우대언 따위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15

고려 시대에, 어사대에 속한 종사품 벼슬. 우리말샘

주16

고려 시대에, 과거의 문과 가운데 제술과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우리말샘

주17

고려ㆍ조선 시대에, 문관(文官)의 반열(班列).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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