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肅宗)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권문(權門)의 사위로서 호사하였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사신이 되어 요(遼)나라에 갔을 때에는 사사로이 진귀한 물건을 선물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115년(예종 10)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이부상서 왕자지(王字之)와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는 진사(進士) 김단(金端) · 견유지(甄惟厎) · 조석(趙奭) · 강취정(姜就正) · 권적(權適) 등을 태학(太學)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1116년(예종 11) 귀국할 때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고려에 전했다고 한다. 1116년(예종 11)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고, 이듬해 1117년(예종 12) 전중소감우승선 겸 태자우찬선(殿中少監右承宣兼太子右贊善)을 지냈다. 1122년 예빈소경 · 추밀원지주사(禮賓少卿樞密院知奏事)를 지냈고, 그 해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한안인을 중심으로 이영(李永) · 정극영(鄭克永) 등과 함께 이자겸을 반대하다가 최사전(崔思全)의 참소로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이듬해인 1127년(인종 5) 이부상서가 되었고 예부상서 지제고 동지추밀원사(禮部尙書知制誥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1128년(인종 6)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원철(李元哲) · 호진경(胡晋卿) · 최윤의(崔允儀) 등을 과거에서 선발하였다. 한편 이중부(李仲孚) · 임경제(林京濟) · 김안(金安) 등과 더불어 서경 천도(西京遷都) 주장에 동조하였다. 동생 문공유가 묘청(妙淸)을 극렬히 반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지상(鄭知常)과 함께 묘청을 성인(聖人)이라 추앙하였다. 묘청에게 국정을 자문하게 하라는 상소까지 올렸지만, 김부식(金富軾) · 임원애(任元敳) · 이지저(李之氐)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1129년(인종 7) 이부상서(吏部尙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검교사공(檢校司空)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1132년(인종 10) 내시인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이중부와 더불어 어의(御衣)를 받들고 서경에 가서 묘청이 만들어 낸 법사(法事)를 행하였다. 다음해 1133년(인종 11)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1135년(인종 13) 서경에서 묘청의 난을 진압하던 김부식이 항복한 윤첨(尹瞻)을 관대하게 대우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공인은 한유충(韓惟忠) 등과 더불어 이에 반대하고 윤첨을 옥에 가두게 함으로써, 서경인들이 재차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뒤에 좌상시(左常侍) 이중(李仲)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지저가 묘청을 추앙한 대신을 처형하라는 소를 올리자 그 이듬해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받아 수태위 판국자감사(守太尉判國子監事)로 좌천되었다. 묘청을 천거하는 등 서경 세력으로 분류되는 인물이지만, 막상 묘청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이들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이중적인 정치 인물로 인식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