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최씨(耽津崔氏)의 시조. 처음에는 내의(內醫)가 되어 점차 승진, 소부소감(小府少監)이 되었다.
예종의 등창을 오진하여 죽게 됨에 한안인(韓安仁)·문공미(文公美)의 처벌요청에 의하여 2년간 귀양을 갔다. 이를 원망, 두 사람을 이자겸(李資謙)에게 모함하여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뒤에 이자겸이 난을 일으킴에 척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상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을 받고, 또 수사공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를 더하였다.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가 되고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승진되었으나 치사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수태위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尉柱國)을 받았다. 시호는 장경(莊景),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