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대년(大年). 안성군의 호장(戶長)으로 경군(京軍)이 된 이중선(李仲宣)의 아들이다.
부친이 죽은 뒤 영업전(永業田)을 물려받아 서리(胥吏)가 되고자 했으나, 정조주사(政曹主事)가 허락하지 않자 숙종 때 과거에 응시, 급제하였다.
이어 직사관이 되었는데, 1104년(숙종 9) 내시 임언(林彦)이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니, “병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짓이다(兵凶器戰危事).”라고 하여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평장사(平章事) 임간(林幹)을 따라 종군했으나 여진에게 패하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이어 지경산부(知京山府)가 되어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다고 한다. 예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한안인(韓安仁)·이여림(李汝霖)과 더불어 시학(侍學)하였다. 1113년(예종 8) 10월 예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1116년 7월에는 이자량(李資諒)과 함께 송나라에 가서 대성악(大晟樂)을 보내준 데에 사례하였다.
이듬해 6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1118년 6월 보문각학사로서 청연각(淸讌閣)에서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을 강론하였다. 1122년(예종 17) 3월 지어사대사보문각학사(知御史臺事寶文閣學士)로 삼았으나, 같은 해 12월 이자겸이 한안인을 죽이자 매서(妹壻)인 연유로 문공미(文公美)·정극영(鄭克永) 등과 함께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어 모자의 가산을 몰수하고 노비로 삼는다는 풍문을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였다. 이자겸이 술사(術士)를 시켜 매장하니 우마가 밟지 않았고, 병학자(病讌者)가 빌면 나았다고 한다. 이자겸이 몰락하자 아들이 개장(改葬)하고, 조정에서는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추증함과 동시에 이부(吏部)의 죄안(罪案)에서 삭제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곧아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나, 벗을 사귀는 데 단정하지 못해 척준경(拓俊京)이 이여림을 모해하고 지녹연(智祿延)과 박경승(朴景升)을 배척할 때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