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이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하여 나라를 중흥시키자고 역설하자, 인종의 근신인 이중부는 묘청을 성인이라고 상주하였다.
1131년(인종 9) 내시로서 서경에 임원궁(林原宮)을 축조하고 궁중에 팔성당(八聖堂)을 두었다. 이것은 고려왕조의 역수(曆數)를 연장시킬 수 있다는 묘청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듬해 내시예부원외랑(內侍禮部員外郎)이 되었고 어의(御衣)를 받들고 서경에 가서 법사(法事)를 행하였다.
이는 왕이 서경 대화궐(大華闕)에 마땅히 임어해야만 하나, 그렇지 못할 경우 근신을 보내어 예의를 갖추어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어의를 경배하면 경복(景福)이 친어(親御)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당시 묘청 등의 주장에 따른 행사였다.
1133년(인종 11)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천도계획의 실패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묘청과 친한 홍이서(洪彛敍)와 함께 효유(曉諭)를 명받았으나 두려워 나아가지 못하였으므로 백령진(白翎鎭)에 보내졌다가 청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