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에, 병부상서 지추밀원사, 추밀원사 판삼사사,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장(元長)
시호
장순(章順)
이칭
왕소중(王紹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66년(문종 20)
사망 연도
1122년(예종 17)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좌산기상시동지추밀원사|동북면병마사겸지행영병마사|병부상서지추밀원사|추밀원사판삼사사|이부상서참지정사판호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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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전기에, 병부상서 지추밀원사, 추밀원사 판삼사사,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초명은 왕소중(王紹中), 자는 원장(元長)으로, 대상(大相) 왕유(王儒)의 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리(胥吏)에서 시작하여 매서인 왕국모(王國髦)가 이자의(李資義)를 죽일 때 궁문을 지킨 공으로 도교령(都校令)이 되었다.

숙종 때 내시를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1108년(예종 3) 8월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윤관(尹瓘) 휘하에서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함주(咸州)·영주(英州)에서 여진을 무찔렀다.

1112년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吏部侍郎樞密院左承宣), 이듬해에 예빈경 추밀원지주사(禮賓卿樞密院知奏事)를 거쳐 1114년 전중감(殿中監)이 되고 같은 해 6월 추밀원지주사로서 호부낭중 문공언(文公彦)과 함께 사악(賜樂)을 감사드리는 사절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1115년(예종 10) 7월 이부상서로서 호부시랑문공미(文公美)와 함께 사은진봉사(謝恩進奉使)로 파견되었으며, 진사 김단(金端) 등 5명이 대학(大學)에서 공부할 수 있게 청하는 표(表)를 올린 바 있다. 이듬해 6월 귀국하면서 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다. 1117년 2월 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12월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이듬해 5월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 (東北面兵馬使兼知行營兵馬事), 1119년 6월에 추밀원사 판삼사사(樞密院使判三司事), 1122년 3월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호부사(吏部尙書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된 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뒤에 간관들이 전공은 있다 하나 위로 임금을 광구(匡救)한 바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이택(利澤)한 바 없다고 하여 배향이 취소되었다. 그는 검교대자소사(檢校大子少師) 김정지(金廷砥)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왕의(王毅)이며, 딸은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공의(李公儀)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켜 패하자 왕의는 인당(姻黨)으로 유배당하였다. 시호는 장순(章順)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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