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초명은 왕소중(王紹中), 자는 원장(元長)으로, 대상(大相) 왕유(王儒)의 현손이다.
서리(胥吏)에서 시작하여 매서인 왕국모(王國髦)가 이자의(李資義)를 죽일 때 궁문을 지킨 공으로 도교령(都校令)이 되었다.
숙종 때 내시를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1108년(예종 3) 8월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윤관(尹瓘) 휘하에서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함주(咸州)·영주(英州)에서 여진을 무찔렀다.
1112년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吏部侍郎樞密院左承宣), 이듬해에 예빈경 추밀원지주사(禮賓卿樞密院知奏事)를 거쳐 1114년 전중감(殿中監)이 되고 같은 해 6월 추밀원지주사로서 호부낭중 문공언(文公彦)과 함께 사악(賜樂)을 감사드리는 사절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1115년(예종 10) 7월 이부상서로서 호부시랑문공미(文公美)와 함께 사은진봉사(謝恩進奉使)로 파견되었으며, 진사 김단(金端) 등 5명이 대학(大學)에서 공부할 수 있게 청하는 표(表)를 올린 바 있다. 이듬해 6월 귀국하면서 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다. 1117년 2월 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12월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이듬해 5월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 (東北面兵馬使兼知行營兵馬事), 1119년 6월에 추밀원사 판삼사사(樞密院使判三司事), 1122년 3월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호부사(吏部尙書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된 후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뒤에 간관들이 전공은 있다 하나 위로 임금을 광구(匡救)한 바 없고, 아래로는 백성을 이택(利澤)한 바 없다고 하여 배향이 취소되었다. 그는 검교대자소사(檢校大子少師) 김정지(金廷砥)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왕의(王毅)이며, 딸은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공의(李公儀)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켜 패하자 왕의는 인당(姻黨)으로 유배당하였다. 시호는 장순(章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