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안인은 고려전기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1122년(예종 17)에 사망했다. 『고려사』 예종 세가에 등장하는 한교여(韓?如)는 한안인과 동일인물이다.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이영·이여림 등과 함께 동궁관으로 예종을 보필하였다. 1108년 여진정벌에 성공하고 개선한 윤관에게 예종의 조서와 하사품을 전해 주었다. 예종 재위 연간에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활약하였으며, 동지공거와 지공거에 임명되어 과거를 관장하였다. 인종 즉위 이후 이자겸 일파의 견제로 승주 감물도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본관은 단주(端州). 초명은 한교여(韓曒如). 자는 자거(子居). 호부시랑 한규(韓圭)의 아들이다. 『고려사』 예종 세가에 등장하는 한교여(韓曒如)는 『고려사』열전에 입전된 한안인과 동일인물이다.
숙종 때 과거에 급제, 예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이영(李永) · 이여림(李汝霖) 등과 함께 동궁관(東宮官)이었으므로 즉위한 뒤에 형제 · 친척이 요로에 많이 등용되었다.
벼슬은 예종 때에 우부승선(右副承宣)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 형부상서 · 예부상서 ·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하였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내시 형부원외랑(內侍 刑部員外郞)으로서 1108년(예종 3) 4월 여진정벌에 성공하여 개선하던 고려군을 맞이하였다. 이때 한안인은 예종의 조서와 임명장을 윤관(尹瓘)에게 전하였고, 자주색 실로 수놓은 말안장 부속품 및 내구마(內廏馬) 2필을 윤관 등에게 하사품으로 나눠주었다.
1109년(예종 4) 6월 김상우(金商祐) · 신안지(愼安之) 등과 더불어 송나라로부터 조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1110년(예종 5) 6월 전중소감 좌승선(殿重少監 左承宣)으로서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위(李瑋)와 함께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 · 장방창(張邦昌) 등의 관반사(館伴使)로 임명되었다.
1111년(예종 6) 3월 승선(承宣)으로서 왕의 명령을 집행하였다. 1112년(예종 7) 2월에 우승선(右承宣)에 임명되어 그해 11월 중서성(中書省)의 변경 방어대책을 물어오기도 하였다. 1112년(예종 7)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1114년(예종 9) 3월에는 좌승선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인 평장사(平章事) 김연(金緣)과 더불어 진사들을 뽑았다.
이후 1116년(예종 11) 6월에는 추밀원지주사 겸 직학사(樞密院知奏事 兼直學士)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에 금나라 장수 살갈(撒喝)이 요나라의 내원성(來遠城, 오늘날 압록강 유역)과 포주(抱州, 오늘날 평안북도 의주 일대) 두 성을 쳐서 거의 함락하자 그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이때 한안인이 파견되어 야율녕을 효유하였다.
1116년(예종 11) 11월 지주사 한안인은 보문각 직학사(寶文閣 直學士) 정극공(鄭克恭), 우부승선(右副承宣) 문공미(文公美), 직보문각(直寶文閣) 윤해(尹諧) 등과 더불어 국왕 앞에서 눈을 읊는 시를 지었다. 1117년(예종 12) 정월에는 청연각에서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강의하였다. 1120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독점하려던 이자겸(李資謙) 일파는 선왕, 즉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왕보(帶方公 王俌)를 비롯해서 문공미(文公美) · 이영 · 정극영(鄭克永) 등 50여 명을 살해 혹은 유배하였는데, 이 때 승주(昇州) 감물도(甘勿島)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 일파와 한안인 일파의 대립은 누대문벌과 신진관료세력과의 대표적인 대립현상이었다. 후일 충선왕이 즉위하여 한안인의 내외손과 현손에게 관직으로 포상할 것을 교서로 내렸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