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각(淸讌閣)이 궐내에 있어 학사들의 직숙(直宿)에 어려움을 겪자, 1116년(예종 11) 홍루(紅樓) 아래에 있는 남랑(南廊)을 수리해 학사들이 회강(會講)하는 당으로 만들었다. 이를 정의당(精義堂)이라 한 뒤, 그 좌우를 휴식처로 삼고 보문각으로 이름을 고쳤다. ‘보문(寶文)’이란 송나라 제도로서, 예종의 숭유(崇儒)와 모화(慕華)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위치는 궁궐 북쪽 청연전(淸讌殿)의 남쪽에 있었다.
부속기관으로는 1116년에 설치된 정의당과 1151년(의종 5)에 세워진 문첩소(文牒所)가 있었다. 소장품은 역대 왕의 조서와 송나라 황제의 어제조칙(御製詔勅)이었다. 그리고 청연각의 학사들이 이곳에 충원된 것으로 보아 청연각의 장서도 함께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관원은 학사(學士) 1인, 직학사(直學士) 1인, 직각(直閣) 1인, 교감(校勘) 4인이었다. 경서(經書) 강론 외에 정책 자료의 저술, 기로연(耆老宴)의 의식제도 및 중국 육조(六朝) · 당(唐) · 오대(五代)의 사료집 교정 등을 맡아보았다. 또한 당나라 태종 때의 여러 신하들과 정치상의 이론을 분류한 책을 주해하고, 중국 사서(史書) 등을 교감하였다. 그리고 이를 주현(州縣)에 분송, 조인(調印)해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 보문서(寶文署)로 개칭되고, 1298년에는 동문원(同文院)에 병합되었다. 그러다가 1314년(충숙왕 1)에 다시 보문각으로 환원되었다. 이 때 대제학(大提學) · 제학(提學) · 직제학(直提學)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대제학을 대학사(大學士)로, 직제학을 직학사(直學士)로 고쳤다. 그리고 대제(待制)를 두는 대신 제학을 혁파하였다. 1362년에 다시 1314년의 제도로 환원하였다. 1369년 관제의 개정으로 모두 학사(學士)로 하고 직각 대신에 응교(應敎)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이후에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다가 조선시대로 넘어와 1420년(세종 2) 수문전(修文殿) · 집현전(集賢殿) 등과 합쳐 집현전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경연(經筵)과 학문연구의 전담기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