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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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전기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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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집현전은 조선 전기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이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적 의례 및 제도의 확립과 대명 사대관계의 정착은 어려운 과제였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이 절실하여 세종이 1420년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집현전은 학문연구기관으로서 도서의 수집·보관·이용 기능, 학문 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다. 다수의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설치 목적에 부응했다.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나 성종 때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이 설치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 전기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
내용

집현전 제도는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서 한(漢)나라 이래 있어 왔다. 그러나 제도가 정비된 시기는 당나라 현종 때로서, 학사(學士)를 두고 시강(侍講 : 강의) · 장서(藏書 : 책의 보관) · 사서(寫書) · 수서(修書) · 지제고(知制誥 : 왕의 교서 등을 지음)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도 오래 전에 이 제도가 도입되어 이미 삼국시대에 유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집현전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이다.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으로 개칭하고 대학사(大學士) · 학사(學士)를 두어 시강 기관(侍講機關)으로 삼았지만,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정종 때 집현전이 설치되었으나, 얼마 뒤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했고, 이것마저 곧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건국 이래로 표방해온 유교주의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적 의례 · 제도의 확립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는 과제였고, 대명사대관계(對明事大關係) 또한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므로 두 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풍(文風)의 진작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궁궐 안에 설치하게 되었다.

설치 당시의 직제는 영전사(領殿事, 정1품) · 대제학(大提學, 정2품) · 제학(提學, 종2품) 각 2인, 부제학(副提學, 정3품) · 직제학(直提學, 종3품) · 직전(直殿, 정4품) · 응교(應敎, 종4품) · 교리(校理, 정5품) · 부교리(副校理, 종5품) · 수찬(修撰, 정6품) · 부수찬(副修撰, 종6품) · 박사(博士, 정7품) · 저작(著作, 정8품) · 정자(正字, 정9품)를 두었다.

이 중 제학 이상은 겸직으로서 명예직이었고, 부제학 이하가 전임관, 즉 전임학사(專任學士)였다. 따라서, 집현전의 실무 책임자는 부제학으로서 행수(行首)라고도 하였다.

집현전의 전임관, 즉 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에는 10인이었다. 그러다가 1422년에는 15인, 1426년에는 16인, 1435년초에는 22인, 그 해 7월에는 32인으로 점차 늘었으나, 1436년에 20인으로 축소되어 고정되었다. 자격은 문사(文士)여야 했고, 그 중에서도 재행(才行)이 있는 연소한 자를 적임자로 삼았다. 한편, 약간 명의 서리(書吏)를 배속해 행정 말단의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집현전은 설치 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도 그와 같은 원칙으로 육성했기에 학구적인 특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해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의 연구직인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해 많은 도서를 구입하거나 인쇄해 집현전에 모아 보관하였다. 또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에서 벗어나 산사(山寺) 등지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연구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도 주었다. 그 밖에 여러가지 특권을 주어 불편하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해 많이 배출되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 제도적으로는 도서의 수장(收藏: 수집과 보관)과 이용의 기능, 학문 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집현전의 기능과 성격은 37년이라는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단계적인 변화를 보이며,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1420년(세종 2)∼1427년(세종 9)]는 활발한 활동은 없었으나, 전시기를 이끌어나갈 대부분의 기능이 마련되었고, 학문적 수련을 쌓아 자기 충실을 기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집현전은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종학교관(宗學敎官) · 강서원관(講書院官)으로 시강과 왕실 교육 담당,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작성, 가성균관직(假成均館職 : 성균관의 임시 관직)으로서 명나라 사신의 접대, 사관(史官)으로서 사필(史筆 : 역사를 기록) 담당, 시관(試官)으로서 예조와 더불어 과거 주관, 지제교(知製敎)로서 사명(辭命, 敎命 : 왕이 내린 명령)의 제찬(制撰), 국왕의 사자(使者)로서 치제(致祭 : 제례를 행함) · 사장 환급(辭狀還給 : 각종 공문의 전달과 접수) · 사신 문안(使臣問安) · 반교(頒敎 : 왕의 교시의 반포), 풍수학관(風水學官)으로서 풍수학 연구 등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제2기[1428년(세종 10)∼1436년(세종 18)]는 집현전의 정원이 16인에서 32인까지 증가되었다. 기능 또한 확대되어 유교주의적 의례 · 제도 · 문화의 정리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고제 연구(古制硏究)와 편찬 사업을 시작해 가장 활기찬 시기였다.

의례 · 제도의 상정(詳定)을 위한 고제 연구에는 예조 ·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런데 집현전의 고제 연구의 특징은 ① 의례 · 제도의 근본적인 것을 상정하기 보다는 의례 · 제도의 실제상에 생기는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많았다는 점, ② 수시로 당면하는 정치 · 제도적인 문제의 해결에 참고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 ③ 세종의 독단적인 시책 강행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 즉 중신의 반대에 부딪쳤을 경우에 이를 물리쳐 자기의 소신을 관철시키고 명분을 세우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편찬 사업은 집현전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조선 초기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편찬 사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치에 귀감이 되고 후세에 영감(永鑑)하기 위한 우리 나라와 중국의 각종 사서의 편찬과 주해 사업이었다.

그 결과는 『치평요람(治平要覽)』 ·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정관정요주(貞觀政要註)』 · 『역대병요(歷代兵要)』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태종실록』 · 『세종실록』 등이었다.

그리고 조선 사회의 유교화를 위해 유교 윤리서인 『효행록(孝行錄)』 ·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을 편찬했고, 국가의 유교적 의례 제도의 정리 사업인 『오례의주상정(五禮儀注詳定)』 · 『세종조상정의주찬록(世宗朝詳定儀注撰錄)』 등도 이루어졌다.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편찬 사업인 『운회언역(韻會諺譯)』 · 『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 ·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 『동국정운(東國正韻)』 · 『사서언해(四書諺解)』 등은 우리 나라의 문화 유산으로서 귀중한 것이라 하겠다. 집현전의 이 같은 고제 연구와 편찬 사업은 세종대의 황금시대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3기[1437년(세종 19)∼1455년(세조 2)]는 집현전의 정원이 20명으로 축소 조정되고, 집현전의 정치상의 지위 상승으로 점차 정치성을 띠는 전환기였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이었기에 조선 초기 정치 권력 구조 안에서의 지위는 높은 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1442년(세종 24) 세종의 신병으로 인해 세자의 정무 처결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이 설치되면서 집현전 학사들은 종래 맡아왔던 서연직(書筵職)과 함께 첨사원직까지도 거의 전담하게 되어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언론 활동이 활발해져서 강력한 언론 기관의 성격을 띠어 언관화(言官化)되었고, 국가 시책의 논의에 참여하는 등 정치 활동도 활발해져서 정치 기관화되었다.

더욱이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 학사의 대간(臺諫)으로의 출입이 잦아져서 집현전이 대간 차출의 본거가 되어 호간고론(好諫高論 : 바른 말을 좋아하고 높은 수준의 논의를 함)적인 집단으로 변하였다. 즉, 집현전의 학문적인 성격에 질적인 변화가 왔던 것이다.

집현전의 이같은 호간고론화는 세조의 무단(武斷 : 무력으로 억압함)적인 왕권 강화책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56년(세조 2) 6월에 일부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집현전에 모여서 단종 복위를 도모한 이른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집현전이 혁파되었다. 그러나 성종 때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弘文館)이 설치되었다.

집현전은 비록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한 기관이었지만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출신들이 세조∼성종대에 현직(顯職) · 요직을 차지하면서 집현전 재직 중에 독서와 고제 연구(古制硏究 : 옛 제도를 연구함) 등으로 쌓은 경륜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실상 세조∼성종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활약한 자들은 집현전 출신이었고, 『경국대전』 편찬 등과 같은 당시의 제도 확립에 공헌한 학자들도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 또한,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해 조선 사회의 유교화에 크게 공헌한 것도 집현전이었다.

요컨대 조선 초기, 특히 세조∼성종대에 정치 · 제도 · 문화 등의 상부구조를 이끌어간 사람들이 거의 집현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정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성종실록』
『필원잡기』
『용재총화(慵齋叢話)』
『증보문헌비고』
「세종조의 집현전」(이광린, 『최현배선생환갑기념논문집』, 1954)
「집현전연구」(최승희, 『역사학보』 32·33, 1966·1967)
「양반유교정치의 진전」(최승희, 『한국사』 9, 1973)
「조선전기 언관의 연구-집현전의 언관화-」(최승희, 『한국사론』 1, 1973)
「집현전의 기능에 대한 연구」(이재철, 『인문과학』 30, 1973)
「집현전학사연구」(정두희, 『전북사학』 4,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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