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8년(충선왕 즉위년) 문한서(文翰署 : 翰林院·藝文館)와 사관(史館 : 春秋館)을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을 설치할 때 정5품직으로 2인을 두었다. 본래 한림원과 춘추관은 문한직(文翰職) 중에서도 으뜸으로, 춘추관의 수찬관을 한림학사가 겸하고 있어 두 기관은 처음부터 병합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원나라의 경우 국사원(國史院 : 고려의 춘추관에 해당)과 한림원이 합하여 한림국사원으로 되어 있는데, 평생을 거의 원나라에서 보낸 충선왕은 이와 같은 원나라의 실용주의를 본받아, 즉위하자 곧 두 기관을 병합하고 지금까지 없었던 정5품 이하 정8품까지의 관원 10인을 증원하였는데 응교도 이 때 처음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예문춘추관도 둘로 분리되면서 응교도 폐지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한림원을 다시 예문관으로 개칭할 때 환원되었고, 1369년 구제(舊制)로 환원될 때 보문각(寶文閣)에 정4품의 직각(直閣) 대신 정5품의 응교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