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가운데 재질과 학식이 있는 자를 선발해 제관전(諸館殿)의 학사로 삼아 왕을 시종하게 했는데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태조때 원봉성(元鳳省)에 한림(翰林)학사를 둔 이래 많은 관서에 학사관직을 두었는데, 모두 문신 중에서 뛰어난 학자들로, 왕의 측근에서 제찬(制撰)·사명(詞命)의 일에 종사하거나 왕에게 경서(經書)를 강론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지공거(知貢擧)의 속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995년(성종 14)에 숭문관(崇文館)을 홍문관(弘文館)이라 고치고 학사를 두었는데, 문종 때 관제를 정해 제관전의 대학사(大學士)를 종2품으로 하고 학사를 정4품으로 하였다.
그 뒤 대학사를 대제학(大提學)이라 고쳤다가 다시 대학사로 고치기도 하고 학사를 사학(司學) 또는 제학(提學)이라 고쳤다가 다시 학사로 고치기도 하였다.
1136년(인종 14)에 문덕전(文德殿)을 수문전(修文殿)이라 고치고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集賢殿)이라 고쳤는데, 문덕전과 연영전에 각각 대학사와 학사를 두었고, 수문전과 집현전에도 각각 대학사와 학사를 두었다. 1199년(신종 2)에 대간(臺諫)이나 지제고(知制誥)와 같이 학사의 직을 띤 자로 하여금 시종에 참여하게 하였다.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홍문관에 학사 이외에 직학사(直學士)를 두었고 다시 숭문관을 두어 학사를 두었다. 1308년에 앞서 1303년 숭문관과 수문전 대신 설치한 우문관(右文館)과 진현관(進賢館)에 학사를 고쳐 각각 대제학·제학·직제학을 두었으며, 1356년(공민왕 5)에 우문관과 진현관 대신 수문관과 집현전을 두어 각각 대학사와 학사를 두었다.
1362년에 다시 수문관과 집현전 대신 우문관과 진현관을 두어 각각 대제학·제학·직제학을 두었으며, 1369년에 우문관과 진현관 대신 수문관과 집현전을 두어 제학을 학사라 고쳤다가 1372년에 다시 우문관과 진현관으로 고치고 학사를 제학이라 고쳤다.
넓은 의미에서 제관전에 포함되는 예문관(藝文館)과 보문각(寶文閣)에도 각각 학사를 두었다. 예문관은 사명(詞命 : 왕명)을 제찬하던 기관으로 태조 때 태봉(泰封)의 제도를 이어받아 원봉성(元鳳省)을 두었다가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고치고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두었다.
현종 때 학사원을 한림원(翰林院)으로 고치고 문종 때 학사승지(學士承旨) 1인, 학사 2인, 시독학사(侍讀學士) 1인, 시강학사(侍講學士) 1인을 두었다. 이 한림원은 1275년(충렬왕 1)에 문한서(文翰署)로 고쳐졌고, 1298년에 충선왕이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쳤다가 뒤이어 다시 문한서로 고쳤다.
1308년에 충선왕이 문한서와 사관(史館)을 병합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 하였고, 1325년(충숙왕 12)에 예문춘추관을 분리함으로써 예문관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공민왕 때 대학사·학사가 두어졌는데, 제관전과 같이 이름이 대제학·제학으로 자주 변경되었다.
1116년(예종 11) 금중(禁中)에 청연각(淸燕閣)을 짓고 학사·직학사 각각 1인을 두어 아침 저녁으로 경서를 강론하게 했는데, 그것이 금중에 있어 학사들의 출입이 불편해지자 곁에 따로 각(閣)을 마련하고 이름을 보문각이라 했으며 뒤에 대학사를 더 두었다.
이 보문각은 1275년에 보문서(寶文署)로 고쳐졌고, 1298년에 충선왕이 동문원(同文院)에 병합했다가 1314년(충숙왕 1)에 다시 보문각을 두고 대제학·제학·직제학을 두었는데, 1356년에 이름을 대학사·학사·직학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대제학·제학·직제학으로 고쳤다.
학사는 과거의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고려에서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자를 학사라 이르고, 문생(門生 : 급제자)은 은문(恩門)이라 칭하였다.
문생과 좌주(座主 : 恩門, 學士)의 예가 매우 중해 학사에게 부모나 좌주가 있으면 과거 합격증서를 준 후에 공복(公服)을 갖추고 가서 뵈었는데, 이때 문생은 줄을 지어 수행해 학사는 앞에서 배례하고 문생은 뒤에서 배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