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한안인(韓安仁)·이영(李永) 등과 함께 시학(侍學)하였으며, 예종이 즉위한 뒤에 한안인과 크게 사이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107년(예종 2) 2월에 왕이 각 도에 안무사를 나누어 보낼 때 기거랑(起居郎)으로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에 가서 백성들의 괴로움을 묻고 수령의 전최(殿最: 고과에 매기는 성적)를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1109년 2월 요나라에 가서 동계(東界)에 9성(城)을 신축한 것을 말하니 요가 반서대(班犀帶) 한벌을 하사하였다.
1112년 8월 승통(僧統) 탱(竀)이 상서우승(尙書右丞) 김인석(金仁碩), 전주목사 이여림과 모반을 도모한다는 밀고로 탱은 거제현에 유배되고, 이여림은 아들과 함께 원지에 유배되었으며 척준경(拓俊京) 등이 비방을 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