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손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전라도지휘사 · 추밀원지주사 · 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초명
김운래(金雲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51년(고종 38)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전라도지휘사, 추밀원부사
관련 사건
구주성전투, 이연년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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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경손은 고려 후기 전라도지휘사·추밀원지주사·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231년(고종 18) 구주성전투에서 정주분도장군으로서 몽골군을 방어해 냈으며, 1237년(고종 24)에 전라도지휘사로서 이연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망이 높아지자 위협감을 느낀 최항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정의
고려 후기, 전라도지휘사 · 추밀원지주사 · 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초명은 김운래(金雲來)이다. 평장사(平章事)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며, 계림부원군 김혼(金渾)의 아버지이다.

주요 활동

성품은 장엄·장중하고 온화하고 온유하였으며, 지략과 용기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었다. 거실에 있을 때도 항상 관례의 두 번째 의식 때 입는 복장의 하나인 조삼(皁衫)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음관(蔭官)으로 출발하여 여러 직을 거쳐, 1231년(고종 18) 정주(靜州: 현 평안북도 의주)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었다. 몽골군이 철주(鐵州: 현 평안북도 철산)를 함락하고 정주에 침입하자 힘써 싸웠다. 이어서 구주(龜州: 현 평안북도 구성)에 가서 박서(朴犀)와 합세하여 구주성전투(龜州城戰鬪)에 참전하게 된다. 김경손은 몽골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남문을 굳게 지켰으며, 포차(砲車)로 맹렬하게 공격하는 몽골군의 공격을 앞장서서 막아내어 구주성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그의 지휘 능력이 크게 인정받았고, 인망이 높아졌다.

1233년(고종 20) 대장군(大將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237년(고종 24)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담양(潭陽)·해양(海陽: 현 광주광역시) 등지를 휩쓸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을 나주에서 무찔러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승진하였는데, 이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직되었다.

1249년(고종 36) 새로 집권한 최항(崔沆)은 김경손이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에 귀양보냈다. 1251년(고종 38) 최항이 계모 대씨(大氏)를 죽이고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죽였는데, 김경손이 오승적의 인척이 된다는 핑계로 사람을 보내 바닷속에 던져 죽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신안식, 『무인정권과 지방사회』 (경인문화사, 2002)
윤용혁, 『고려 대몽항쟁사 연구』 (일지사, 1991)

논문

윤용혁, 「대몽항쟁기의 민란에 대하여」 (『사총』 30, 고려대학교 사학회, 1986)
집필자
윤용혁(공주대학교 명예교수,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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