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은 장엄·장중하고 온화하고 온유하였으며, 지략과 용기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었다. 거실에 있을 때도 항상 관례의 두 번째 의식 때 입는 복장의 하나인 조삼(皁衫)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음관(蔭官)으로 출발하여 여러 직을 거쳐, 1231년(고종 18) 정주(靜州: 현 평안북도 의주)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었다. 몽골군이 철주(鐵州: 현 평안북도 철산)를 함락하고 정주에 침입하자 힘써 싸웠다. 이어서 구주(龜州: 현 평안북도 구성)에 가서 박서(朴犀)와 합세하여 구주성전투(龜州城戰鬪)에 참전하게 된다. 김경손은 몽골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남문을 굳게 지켰으며, 포차(砲車)로 맹렬하게 공격하는 몽골군의 공격을 앞장서서 막아내어 구주성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그의 지휘 능력이 크게 인정받았고, 인망이 높아졌다.
1233년(고종 20) 대장군(大將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237년(고종 24)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담양(潭陽)·해양(海陽: 현 광주광역시) 등지를 휩쓸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을 나주에서 무찔러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승진하였는데, 이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직되었다.
1249년(고종 36) 새로 집권한 최항(崔沆)은 김경손이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에 귀양보냈다. 1251년(고종 38) 최항이 계모 대씨(大氏)를 죽이고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죽였는데, 김경손이 오승적의 인척이 된다는 핑계로 사람을 보내 바닷속에 던져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