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8년(고종 35) 최우의 명으로 환속해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임익(任翊)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權韙)에게 예(禮)를 익혔다. 뒤이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고 최우로부터 가병(家兵) 500여 명을 나누어 받아 후계자로서 인정받았다.
이듬해 1249년(고종 36) 최우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어사대부태자빈객(御史大夫太子賓客)이 되고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었다.
최항은 자신의 집권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민희(閔曦), 추밀원부사 김경손(金慶孫)을 귀양 보내고, 전 추밀원부사 주숙(周肅)과 형부상서(刑部尙書) 박훤(朴暄)을 죽였다. 1251년(고종 38)에는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하고 귀양 보냈던 김경손을 죽였다.
집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선세(魚梁船稅)를 면제하고, 각 지방에서 가렴주구를 일삼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수획원을 소환하고 그 임무를 안찰사(按察使)에게 맡기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차츰 호사와 향락을 일삼으며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몽골에 대한 정책으로는 몽골의 강화(江華)로부터의 출륙(出陸)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1250년(고종 37)에 승천부(昇天府: 현, 경기도 개풍군)에 새 궁궐을 짓기도 하였으나, 최우의 반몽정책(反蒙政策)을 그대로 계승하여 몽골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최항은 강도(江都)의 방어시설을 강화하기 위하여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사이에 1250년 8월에 중성(中城)을 추가로 구축하였다. 중성의 둘레는 2,960여 칸, 대소의 문이 도합 17개였다.
1253년(고종 40) 몽골의 야굴(也窟)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태자나 왕자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보내 회군을 청하라는 권고의 글을 보내왔으나 거부하였다. 몽골군이 전국을 유린하자 왕이 승천부의 새 궁궐에 나가 몽골의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한때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몽골 침입에 대응하여 각 지역에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하여 섬과 산성으로의 피란 입보를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1254년(고종 41)에 왕이 부(府)를 열게 했으나 사양하였으며, 뒤이어 중서령(中書令)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월남사(月南寺)의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탑비 건립을 후원하였고, 그가 지었다는 몇 편의 시가 전한다.
1256년(고종 43)에 제중강민공신(濟衆康民功臣)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 진평공(眞平公)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