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출신 미상. 본명은 주영뢰(周永賚)이다.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와 동서지간이었다. 사위는 장군 최종필(崔宗弼)이다.
성격이 과장이 심하고 허풍을 잘 떨었다고 한다. 최우와 동서 간이었으므로 최우가 그를 믿고 심복으로 삼았다. 참소가 있을 때마다 최우가 주숙에게 처리를 맡기면 최우의 뜻에 맞추느라고 진상을 규명치 않고 죽였고, 교위(校尉)의 선발을 관장하였을 때 뇌물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선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
이후 지이부사(知吏部事)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최우가 사망하자 야별초(夜別抄)와 내외도방(內外都房)을 영솔하고 정권을 다시 왕에게로 돌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결단치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전전승지(殿前承旨)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초명 金仁俊) 등 70여 명이 최항의 권력 승계를 지지하자 최항에게 붙고 말았다. 최항은 주숙이 가장 앞서 자기편이 되었다고 하여 대단히 후하게 대접하고 모든 일을 그에게 자문하였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까지 올랐다.
주숙은 최항이 견자산(見子山) 집으로 이사할 때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이때부터 최항을 의심하고 꺼리게 되었다. 1250년(고종 37) 주숙은 최항이 보낸 낭장 임경(林庚)에 의해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웅천(熊川) 바다에 빠트려져 죽임을 당했다. 주숙은 장군 김효정(金孝精)이 중상한 까닭이라고 억측하고 죽을 무렵에 김효정이 자신과 함께 정권을 임금에게 복귀시킬 음모를 꾀했다고 참소하였다. 임경이 돌아가서 그 말을 최항에게 고하니 최항이 김효정을 유배보냈다가 죽이고, 주숙의 사위인 장군 최종필을 유배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