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적 ()

고려시대사
개념
고려후기 특히 명종 · 신종대에 남부지방에서 봉기한 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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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특히 명종 · 신종대에 남부지방에서 봉기한 도적.
연원 및 변천

남적은 처음에 무신정권 하의 사회적·경제적 모순에 따른 농민생활의 불안에 의해 야기된 순수민란의 성격을 띠고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점차 연합공동전선을 구축하면서 정권탈취, 나아가 고려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미 1175년(명종 5) 이전부터 석령사(石令史) 등이 인솔한 무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여러 계통으로 다투어 일어났다. 특히, 이듬해 6월 공주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켜, 한 때 충청도 전역을 휩쓸었다. 11월에는 손청(孫淸)이 병마사를 자칭하며 가야산을 횡행하다가 항복하였다.

그 외에 1177년 2월 전라도안찰사에게 내항한 미륵산적(彌勒山賊)이나 황려현(黃驪縣 : 지금의 경기도 여주)·진주(鎭州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를 침구한 남적, 3월에 좌도병마사가 사로잡은 이광(李光) 등이 있었다. 그 뒤, 1182년에는 충청도의 관성(管城)과 부성(富城)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전주에서도 군인과 관노(官奴)의 난이 있었다.

그 뒤, 남적의 기세는 약간 수그러지다가, 1190년 경주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남적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관군의 토벌에 의해 동경(東京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 관내의 운문산 등지로 옮겨가 난을 지속하다가, 1193년 운문의 김사미(金沙彌), 초전의 효심(孝心) 등에 의해 대규모의 민란으로 확대되어 경상도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사미가 투항해 참수된 뒤, 밀성 저전촌(楮田村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 산내면)에서 7,000여 명이 관군에 의해 참획당하고, 마침내 효심마저 사로잡힘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1199년(신종 2) 명주의 난이 삼척·울진으로 확대되고, 또한 진주·합주(지금의 합천) 등에서도 난이 일어나는 등 남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202년에 이비(利備)·패좌(孛左) 등에 의해 경주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난은 이의민(李義旼)의 여당(餘黨)과 경주지방의 하급관인 및 군인층이 합세해 촌락 기민(飢民)이나 유망농민층을 비롯한 초적세력을 규합, 조직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삼군을 편성하고 ‘정국병마사(正國兵馬使)’를 자칭하면서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해 상주·청주·충주·원주지방에까지 격문을 돌리는 등 고려왕조 자체의 전복을 꾀하였다.

그러나 최충헌(崔忠獻)의 과감한 토벌에 의해 결국 진압당했다.

의의와 평가

남적에 대한 진압의 결과, 난의 발상지인 경상도의 재편작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최충헌정권은 남적 등의 농민반란을 과감하고 신속하게 진압함으로써 지배층의 호응을 받아내어 오히려 그의 정권을 다지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민란이 지속적으로 유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무신정권하(高麗武臣政權下)에서의 경주민(慶州民)의 동태(動態)와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김호동, 『민족문화논총(民族文化論叢)』 2·3합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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