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망소이의 난 (·)

고려시대사
사건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
이칭
이칭
공주 명학소의 난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176년(명종 6)
종결 시기
1177년(명종 7)
발생 장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
관련 인물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망이·망소이의 난은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이다. 이 저항은 무신정변을 전후해서 비등해졌던 사회 경제적 폐단에 따른 가중된 수탈 정책에 맞선 것이었다. 망이, 망소이 등 소민이 허위적이긴 하였으나 소(所)를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중앙의 양보를 얻어냈다는 점은 이후의 저항 세력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들이 저항의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근거지였던 명학소의 지역적 특성 및 소의 주민과 같은 불만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시대적 분위기였을 것이다.

정의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소민(所民)의 저항.
발단

망이·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의 亂)은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所)의 주민은 공장(工匠)과 같이 천업(賤業) 종사자라는 이유로 양민보다 낮은 지위에 놓여 있었다. 또한 소의 주민들은 대부분 본래의 생업인 농업까지 병행해야 했으므로 이중의 고역에 시달렸다. 현재 명학소로 추정되는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炭坊洞)의 옛 지명이 ‘숯병이’라고 한다. 철광석을 녹여 철을 제련해 내기 위한 연료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숯이었다. 공주의 토산물이 수철(水鐵)과 동철(銅鐵)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학소가 숯 생산지이고, 그 주변 지역에는 철광석 산지가 널려 있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명학소는 철소(鐵所)로서의 이상적인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철소의 주민은 철을 제련할 줄 아는 장인과 철광석 운반 등에 필요한 단순 인력으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장인들이 일종의 지도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명학소 봉기의 중심인물이었던 망이(亡伊) · 망소이(亡所伊) 역시 장인인 철 제련 기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명학소에서 저항을 일으킨 시기에는 서북면 지역에서 조위총(趙位寵)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무기류의 생산 등 전투에 필요한 물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즉 명학소의 저항은 소 지역의 수취 체제에 따른 부담, 이 시기에 가중되었던 집권 무신 세력의 탐욕과 포학 등 여러 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및 결과

1176년(명종 6) 정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 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는 우선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郎將) 박강수(朴剛壽)를 보내 회유하였다. 그러나 저항 세력이 응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에 대장군(大將軍)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저항을 진압하도록 했지만, 이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다시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고, 저항 세력을 위로하고 달래는 등 회유책을 썼다.

망이 등은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산현(禮山縣)을 공략해 감무(監務)를 살해하고 충주(忠州)까지 점령하였다. 정부는 다시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남적처치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에 1177년(명종 7) 정월 망이 · 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함으로써 저항이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망이 · 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가야사(伽耶寺: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덕산에 있음)를 공격하였고, 3월에는 홍경원(弘慶院: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직산에 있었음)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할 것임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망이 등이 홍경원의 주지를 시켜서 개경 정부에 전달한 글에 의하면,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이유는 저항이 진정된 이후 정부에서 다시 군대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아주(牙州: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이들에 대해 강경책을 펼쳐, 같은 해 5월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저항 세력들은 큰 타격을 입어 그해 6월에 망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고, 7월에 망이 · 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갇힘으로써 1년 반 동안의 저항이 완전히 진정되었다.

의의 및 평가

망이 · 망소이의 저항은 특수 행정 구역인 소(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반 농민들의 저항과 구별된다. 이들이 봉기한 원래 목적은 신량역천(身良役賤)에 해당하는 소민(所民) 신분에서 탈피해 국가의 직접적이고 과도한 수취를 모면하려는 데 있었다. 명학소 주민만으로 이 같은 대규모의 봉기가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저항의 발발 초기에 공주 관아를 습격할 때부터 이미 주위의 일반 농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들의 저항은 향 · 소 · 부곡(鄕所部曲) 주민의 신분 해방운동과 농민 저항의 두 가지 성격이 결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타의 저항 세력과 협력 관계를 이루지 못하였고, 중앙 정부와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는 등 저항의 지향점이 분명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이 저항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후 향 · 소 · 부곡 등 특수 행정 구역의 소멸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이정신,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1)
김갑동 외, 『고려 무인정권과 명학소민의 봉기』(다운샘, 2004)

논문

김호동, 「명학소민 봉기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한국중세사연구』 15, 한국중세사학회, 2003)
배상현, 「명학소민 봉기를 통해 본 불교사원과 지방사회」(『한국중세사연구』 15, 한국중세사학회, 2003)
변태섭, 「농민·천민의 난」(『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신안식, 「고려 명종대 지방사회의 동향」(『건대사학』 9, 건국대학교 사학회, 1997)
이정신, 「고려시대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에 대한 일연구」(『한국사연구』 61·62, 한국사연구회, 1988)
旗田巍, 「高麗の明宗·神宗代に於ける農民一揆」(『歷史學硏究』2-4·5, 靑木書店,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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