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시대 사회의 수공업 기술자들을 부르는 일반적 명칭은 장인(匠人)이다. 공장(工匠)은 장인 중에서도 국가의 직역 체제 아래에 편재된 장인층을 의미한다. 고대 국가 성립 이후 국가는 주민들을 제일적(齊一的) 지배 아래에 두기 위해 주민들에 대한 편제를 시도하였고, 장인들을 공장(工匠)이라는 직역(職役)으로 편제하였다.
국가에 의한 제일적 지배 체제의 편성은 국역 체제의 편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므로 공장은 신분과도 밀접하게 결부되었다. 요컨대 장인(匠人)은 직업적 개념의 용어이고, 공장(工匠)은 국가의 직역 편제에서 부여된 개념이면서 동시에 신분과 관련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공장의 시대적 변천을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공장
『 삼국사기』와 『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왕실과 관청의 영조물을 건설하는 장인과 국방용 무기를 제작하는 장인, 국왕과 귀족의 생활 용구, 장신구 등을 제작하는 장인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수공업 생산은 장인들을 국왕이나 관청에 인신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시대 장인의 위상은 그다지 낮지 않았다. 고대국가의 성립은 철기의 사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금속을 다루는 공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신라의 장인은 경위(京位)나 외위(外位)에 해당하는 관등을 가졌으며, 중앙의 상층 장인은 5두품이나 4두품에 해당하는 경위를 지니고 있었고, 지방의 장인은 촌주에 속하는 신분이었다.
백제에서도 6세기 이후 장인에 대한 호칭으로 박사(博士)를 사용하였고, 박사들을 왜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법흥사(法興寺) 건립을 돕기 위해 백제에서 파견하였던 노반박사(露盤博士)나 와박사(瓦博士) 등의 명칭이 전하고 있다.
신라에서도 장인을 박사로 불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771년 조성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명문에 기록된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대나마(大奈痲) 박종일(朴從鎰), 차박사(次博士) 나마(奈麻) 박빈나(朴賓奈)의 예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면 백제와 신라에서 우수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은 특별히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수공업은 궁정 수공업과 관영 수공업, 민간 수공업, 사원 수공업, 성(成) 수공업으로 구분된다. 궁중 수공업은 5-6세기 사적 소유가 확대되고, 귀족 내부의 혈연적 분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진평왕(재위: 579∼632) 때 국왕 직속의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고, 탁부(啄部), 사탁부(沙啄部)의 기존 생산 조직을 바탕으로 궁중 수공업 체제가 확립되었다. 681년(신문왕 1)에는 진골 귀족이 공유하던 6부의 생산 관사를 국왕 직할로 귀속하고, 본피궁(本彼宮)을 수반으로 하는 궁중 수공업 체계를 정비하였다.
내성(內省) 산하에 금전(錦典), 기전(綺典), 철유전(鐡鍮典), 도등국(陶登局), 물장전(物藏典), 와기전(瓦器典)등 30개에 가까운 수공업 운영 관청들이 설치되어 왕실 귀족의 수요품을 생산, 조달하였다. 금전과 기전은 고급 비단과 직물류를 생산하는 관청이며, 철유전은 철기와 유기를 생산하였고, 도등국은 도기의 생산, 물장전은 금, 은 등 각종 장신구류를 생산 관리하였으며, 와기전은 기와나 벽돌을 생산하는 관청이었다.
관영 수공업은 신문왕(재위: 681~692년) 대에 공장부감(工匠府監)의 설치를 계기로 그 체제가 확립되었다. 공작부감은 지방의 장인들을 등록하고 공납을 받는 등 통제하는 관청이었다. 공작부감에서는 병기 제조와 축성도 담당하였다. 관영 수공업은 장인들을 입역(立役)시켜 무기는 군기시(軍器寺), 관용 물품은 소부시(小府寺), 토목 영선 및 공장의 관리는 장작감(將作監)에서 담당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관영 수공업 관청은 집사부(執事部) 산하에 소속되었는데, 이곳에 소속된 관청은 9개였다. 산하 관청수를 비교해 보더라도 궁중 수공업이 관영 수공업을 압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문왕 대 이후 궁중 수공업은 생산 공정별로 분업화되고 협업화된 체제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 하대에 중국 사치품이 유입되면서 궁중에서의 수요가 감소하였고, 궁중 수공업은 점차 쇠퇴하였다.
궁중 수공업이 쇠퇴하자 이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관영 수공업이 성장하였다. 내성 산하 수공업 관청에서 생산되던 수공업 제품들은 관영 수공업에서 일괄 제조하는 체제가 성립한 것이다. 관영 수공업에서 조달되지 못하는 것은 민간의 수공업 집단에서 공물로 수취하여 충당하였다. 궁중 수공업은 신라 말 골품제의 붕괴와 궤를 같이 하면서 점차 관영 수공업 체제에 흡수되어 갔다.
민간 수공업은 소규모 수공업을 운영하던 장인들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장인들은 소규모 생산 시설을 토대로 철제품이나 일용 잡화들을 생산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관청, 궁정 수공업장에 나가서 무보수로 일하도록 강요당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적 처지는 일반 양인 농민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사원 수공업은 불사(佛寺) 경영에 필요한 수공업 기술자인 승장(僧匠)에 의해 운영되었다. 승장은 일반 관장의 기술을 습득한 승려이면서 장인이며, 이들은 각 사찰의 자율성이 제고되면서 전문 분야에 따라 석장(石匠)과 철장(鐵匠)으로 나뉘는 한편, 승장의 위계 또한 박사(博士), 조박사(助博士), 대장(大匠), 부장(副匠)으로 분화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소수공업(所手工業)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수공업도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20개의 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여금성(麗金成), 보검성(宝劍成), 탁금성(濯錦成), 진금성(進錦成)과 같이 수공업과 매우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고 보이는 지명들이 있다. 여금성은 금, 은, 통 등을 가공하는 수공업 집단, 보검성은 보검을 만들던 집단, 탁금성, 진금성은 비단 직조업을 하는 집단의 거주지로 볼 수 있다.
성은 특정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지역인 것이다. 성들은 중앙 관청이나 지방 고을에 직속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민간 수공업자 집단을 가리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관청에 예속되어 그 요구에 따라 물품을 생산하기도 하는 집단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공장
통일신라시대 궁정 수공업과 관영 수공업은 고려의 성종(재위: 981∼997년) 연간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면서 관영 수공업 체제로 일원화되었다. 이에 고려의 수공업 체제는 관영 수공업, 민영 수공업, 소수공업, 사원(寺院) 수공업으로 재편된다.
관영 수공업은 운영 주체가 국가 기구이며 그에 소속된 인원은 일정한 직위를 가지고 전업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공장과 부역 형태로 노동하는 공장의 두 부류로 나뉜다. 민영 수공업은 장인들이 사적으로 수공업을 영위하는 것이다.
소수 공업은 금, 은, 동, 철, 소금과 같은 원료 산지에서 원료를 채굴하고 조달하는 업무를 주로 하면서 동시에 일부에서는 제품도 생산하여 국가에 공납으로 바치는 형태로 운영하였다. 사원 수공업은 사찰에 전속된 승장(僧匠)에 의해 영위된 수공업으로 불사, 불탑 등의 건축이나 사원에서 필요한 각종 의례 기구 등을 제작하는 일을 하였다.
고려는 983년(성종 2)에 공장안(工匠案)을 만들어 공장을 등록시켜 수공업 생산에 동원하는 한편, 공장역을 세습하게 하고 공장의 입사(入仕)를 금지하는 등 공장제도를 정비하였다. 공장을 국역 체제 아래 편재함으로써 공장의 직역(職役)을 고정하여 관영 수공업의 토대를 확고히 한 것이다. 현종 때 개경 나성 건설에 동원된 공장이 8,450명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공장안에 등록된 공장은 수만 명 수준으로 많았을 것이다.
공장안에 등록된 공장의 신분 구성은 단일하지 않았다. 양인 신분이 대부분이었지만, 노비나 양인과 노비의 중간층에 속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공장이 천시되긴 하였지만, 양천제 아래에서의 천인은 아니었다. 양인 신분의 공장은 양인인 백정 농민에 비해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
고려시대 공장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관청 소속 여부에 따라 관속과 비관속으로 구분하거나, 국가의 수취 체제의 편제를 중심으로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한다. 이 외에도 사원에 소속된 장인으로 승장(僧匠)이 있었다.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조선시대처럼 경공장, 외공장의 법제적 구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 후기의 금속기에서 ‘경양공모(京良工某)’, ‘경사공인(京師工人)’, ‘재경모(在京某)’ 등과 같은 기록이 확인되고 있어, 공장 사이에 경외(京外)의 구분은 관행적으로 존재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비관속 장인은 평상시에는 민간 수공업을 영위하는 사장(私匠)이지만, 국가에 역을 진다는 점에서 외공장의 처지와 다를 바 없었다고 추정한다.
공장은 고려 건국 초기 독자적인 신분으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10세기 후반 무산계(武散階)가 제정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고려의 국역 체제에 편입됨으로써 독자적인 직역층으로 고정되었다. 공장은 무산계 29등급 중 28번째인 종9품 하의 배융부위(陪戎副尉)와 29번째 종9품 상의 배융교위(陪戎校尉)에 전직할 수 있었는데, 승진 상한은 정6품 상의 요무교위(燿武校尉)까지였다. 문종(재위: 1046∼1083) 대 이후 품관직으로 입신하는 공장이 출현하는 등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졌지만, 고려 말기에 이르면 공장의 사회적 지위는 다시 하락하여 공장의 품관직 진출은 쇠퇴하였다.
경공장은 원래 개경에서 활동해 온 장인들 이외에도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왕경이나 기타 호족의 지배 영역에서 흡수한 장인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중앙 관청에 편제되어, 창이나 칼 등의 무기류와 갑옷 등의 군수품, 그리고 국가나 왕실, 귀족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필수품과 사치품을 생산하였다.
경공장은 별사(別賜)와 무산계 전시(武散階田柴)를 지급받는 직역층(職役層) 공장과 무상으로 부역하던 일반 부역층(賦役層) 공장으로 구분된다. 직역층 공장의 일부는 정식 무산계나 남반(南班) 이서직(胥吏職) 내지 남반 동정직(同正職)을 띠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직역층 공장 가운데에서도 상층 공장들이었다.
직역층 공장은 부역층 공장들을 인적, 기술적으로 지휘 감독하면서, 300일 이상 관영 수공업장에서 복무하는 장인들이었다. 직역층 공장의 감독을 받으며 생산에 종사하는 부역층 공장은 사적인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번차제(番次制)에 따라 부역하였다. 부역층 공장은 공납과 같은 현물 납부가 아닌 노동력 제공의 부역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하였다.
경공장들이 소속된 관영 수공업장은 관청과 업종에 따라 그 존재 형태가 다양하였다. 대부분의 관영 수공업장은 액정국(掖庭局)의 경우처럼 소속 공장들이 모두 직조공(織造工)으로서 작업의 성격이 사실상 동일하여, 하나의 작업장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제요(諸窯) 소속의 와요(瓦窯)와 같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기와나 자기처럼 생산량이 많고 운반이 어려운 제품은 소비지와의 운송이 편리한 곳에 관영 수공업장이 분산되어 설치되었을 것이다.
『고려사』 식화지에는 공장들이 소속된 관청과 종류 및 처우를 규정하고 있는데, 각 관청에 소속된 공장의 종류를 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관청 |
수공업 생산품 |
소속 공장 |
장야서(掌冶署) |
금속제품 |
銀匠, 和匠, 白銅匠, 赤銅匠, 鏡匠, 皮帶匠, 金箔匠, 生鐵匠 |
군기감(軍器監) |
무구(武具) |
皮甲匠, 牟匠, 和匠, 白甲匠, 長刀匠, 角弓匠, 漆匠, 鍊匠, 弩筒匠, 旗畫業(匠), 箭匠, 箭頭匠, 皮匠 |
중상서(中尙署) |
왕실 기완(器玩) |
畫業(匠), 小木匠, 韋匠, 紅鞓匠, 朱紅匠, 雕刻匠, 螺鈿匠, 漆匠, 花匠, 紙匠, 珠簾匠, 竹篨匠, 御盖匠, 黃丹匠, 梳匠, 磨匠 |
내궁전고 (內弓箭庫) |
궁시(弓矢) |
角弓匠, 箭匠, 箭頭匠, 弓袋匠 |
도교서(都校署) |
세공품(細工品) |
木業(匠), 石業, 雕刻匠, 粧覆匠, 泥匠 |
상승국(尙乘局) |
왕실 마구(馬具) |
大韂匠, 鞍轡匠, 鞍褥匠, 馬匠, 持馬匠 |
대복시(大僕寺) |
마구(馬具) 제조 |
大韂匠, 鞍褥匠, 皮匠 |
잡직서(雜織署) |
직물 직조 |
罽匠, 繡匠 |
액정국(掖庭局) |
견직물 직조 |
錦匠, 羅匠, 綾匠 |
상의국(尙衣局) |
의복 제작 |
繡匠, 幞頭匠, 靴匠, 帶匠, 花匠, 靸鞋匠, 笏袋大匠 |
〈표 1〉 제아문공장별사조(諸衙門工匠別賜條)의 관할 관청과 소속 工匠 |
〈표 1〉에 기록된 것 외에도 경공장의 업종은 매우 다양하였다. 각종 옥이나 수정, 유리 제품, 연등, 우산, 기와 등을 제작하는 공장도 있었으며, 복두점(幞頭店), 견관서(甄官署), 제요(諸窯) 등의 관청에서도 경공장들이 소속되어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들 관청에 소속된 공장들이 별사(別賜)조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이 업종이 1년 내내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업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장 중에서 중앙 관청에 소속된 공장이 아닌 지방 관청에 소속된 공장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외공장으로 따로 규정하였지만, 고려시대에는 이를 경공장과 법제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 관아에 소속된 장인들을 학계에서는 편의상 외공장으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학계의 통설에 따라 외공장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지방 관청에 소속된 외공장은 경공장과 마찬가지로 연중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하면 별사를 지급받았는데, 양인 신분이 대다수이긴 하였지만, 관청 소유의 노비들도 있었다. 외공장은 농촌에서 반농반공(半農半工)의 가내공업이 성장하여 전업으로 전환된 자, 궁정 또는 귀족적 수공업자에서 임용노공(賃用勞工)으로 전환된 자, 귀화민으로서의 투화장(投化匠) 중에서 독립 공장으로 분화된 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외공장의 기술 수준은 경공장에 비해 낮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외공장의 존속은 지방 역시 중앙 행정기구의 제도를 본받아 운영되었기 때문에, 1차적으로 공장 개개인의 공역뿐만 아니라 매년 상공(常貢)을 비롯해 별공(別貢), 과렴(科斂) 등의 명목으로 중앙 정부에 공물을 바쳐야 하였다.
고려 광종 대에 시행된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공장의 사회적 처지는 전반적으로 하락하였다. 특히 외공장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누렸던 경공장의 사회적 위상도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고려 사회에는 관청에 소속되지 않고 사적으로 수공업을 영위하는 민영 수공업장의 장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비관속 공장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민영 수공업 장인들은 관청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모두 공장안에 등재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았으며, 건물이나 성(城)의 축조 등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 노동력과 기술을 제공해야만 하였다. 이들 사장(私匠)들은 국가의 상번요역(上番徭役) 외에 매년 상공과 별공의 형식으로 공물을 상납하였던 것이다. 사장들은 독자적으로 판매용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독립 수공업 장인과 기술과 노동을 제공한 댓가로 급료를 받는 노동자적 성격의 장인으로 구분되었다.
민영 수공업 장인들은 크게 3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는 농촌에서 반농반공(半農半工)으로 공예품을 제작하다가 점차 전문 공장으로 성장한 자, 둘째는 위치가 높은 경공장에 편입되어 있거나 문벌 귀족 밑에서 공예품을 제작하다가 점차 성장해 실용기명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윤을 위해 생산한 자, 셋째는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귀화한 이들 가운데 사성을 받고 독립 장공인으로 분화한 자들이 그것이다. 민영 사장들은 주로 실용품을 제작, 판매하였는데, 13세기 말경 공물 대납제가 출현한 이후 민영 수공업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소(所)는 특산물을 생산하여 중앙에 공납하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금소, 은소, 동소, 철소, 사소(絲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자기소(磁器所), 어량소(魚梁所), 강소(薑所), 도기소(陶器所), 묵소(墨所), 다소(茶素), 곽소(藿所) 등 전국에 수백 개 소가 있었다. 소는 주, 군, 현에 속하면서도 군현의 일반 주민과는 달리 수공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소 수공업은 수공업자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강제적인 분업 체계의 일환으로 군현의 하부 조직에 편제되어 국가의 공납 수용에 응하는 것이다. 특정 원료나 제품의 생산지였던 소에서는 주민들의 노동력과 외공장의 기술이 결합하여 원료 채취와 가공이 이루어졌다.
중앙 관청의 통제를 받던 소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소 주민들의 유망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권력 기관이나 권세가들에 예속되어 부역을 면제받는 지역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 결과 소에서 원료의 가공과 제품 생산에 종사하던 많은 공장들은 점차 독립적 전업적 수공업자로 전환하여 갔다. 고려 후기에 소가 해체되면서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공장들은 자유롭게 사적인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였고, 이들은 사치를 부릴 정도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사원은 전국에 2,000~3,000여 개소를 헤아린다고 한다. 승려 또한 10만여 명에 달하여 사원 경제가 고려 사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수천 개에 달하는 사원에서는 불탑이나 불사, 불상 그리고 각종 의식에 필요한 불구(佛具)를 제작하였기 때문에 목공 · 금속 · 석공 기술을 소지한 장인들을 다수 보유하였다.
사원에 소속된 장인인 승장(僧匠)은 승적을 갖고 사원에 소속된 승려인 동시에, 특정 기술을 가지고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공장으로 이중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사원 수공업 경영은 사찰 운영에 필요한 불구의 생산을 우선시하였지만, 세속에서도 사용하는 의류나 기와 등도 생산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외부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원 수공업 발전은 고려 이전부터 사원이라는 특수성을 바탕으로 독특한 생산과 소비 구조를 창출하였다. 고려 후기 관청 수공업이 쇠퇴하는 상황을 틈타 사적 생산 체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사찰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데, 일부 경공장들이 사찰로 투탁하면서 사원은 양질의 기술 집단을 다수 보유하게 된다. 이들은 승려 신분의 공장과는 구분되는 사찰 소속의 단순 공장이었다.
조선시대의 공장
조선 왕조가 개창된 이후 조선 왕조는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제품을 장인을 징발하여 생산하고, 전국 장인들에게 장세제(匠稅制)를 실시함으로써 관영 수공업체제를 확대하였다. 고려시대의 소 수공업은 조선의 관영 수공업 체제로 흡수되었다.
조선 왕조는 서울과 지방에 있는 모든 공장을 장적(匠籍)인 공장안(工匠案)에 등록시켜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구분하고, 장적은 공조(工曹)와 공장이 소속되는 관청, 그리고 각 도와 읍에 보관하였다. 장적을 만듦으로써 관청에서는 공장의 노동력을 손쉽게 파악하고 동원할 수 있었으며, 동원하지 않은 공장에게 공장세를 받는 근거로 삼을 수 있었다.
장적에 등록된 공장은 각자가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수공업자로서 민영 수공업장에서 자율적인 생산에 종사하였으며, 규정에 따라서 1년 중의 일정한 기간만 의무적으로 관설 수공업장에 동원되어 관역(官役)에 종사하였다. 공장이 관설 수공업장의 작업에 동원되는 규정은 일종의 정기적 복무제였다. 공장들은 해당 작업장에 2번 내지 3번의 교대제로 작업에 임하였으며, 관역에 동원되는 기간은 급료를 받았다.
정부에 바치는 장세(匠稅)는 관역에 동원된 기간은 면제되고 자율적인 생산에 종사한 기간만 부담하였다. 공장의 영업 규모 및 판매 실적 등을 고려하여 책정된 장세의 액수는 크고 작은 변동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전국의 수공업자들에 적용되었다. 공장들은 저화(楮貨)나 동전, 쌀이나 철(鐵) 등 화폐와 현물로 장세를 납부해야 하였다.
『경국대전』에 등록된 경공장은 130종 2,795명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30여 개의 관청에 소속되었다. 경공장 가운데 100명 이상의 공장은 야장(冶匠), 시인(矢人), 궁인(弓人), 방직장(紡織匠), 능라장(綾羅匠), 사기장(沙器匠), 옹장(甕匠) 등 7종이다. 사기장이 가장 많아 386명, 그 다음 야장 190명, 시인 170명, 궁인 109명 순이다. 도자기 제조, 무기 제조과 더불어 의류 직조 장인들도 많았는데, 방직장과 능라장이 각각 109명, 106명이었다.
공장이 가장 많은 관청은 상의원(尙衣院)과 군기시, 사옹원, 선공감, 공조, 교서관 등이다. 그중에서도 상의원에 68종 597명, 군기시(軍器寺)에 16종 644명이 속해 있었다. 전체 경공장의 거의 절반이 상의원과 군기시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경공장은 관청에서 설치한 수공업장에 정기적으로 복무하였다. 이들은 해당 작업장에 2번 내지 3번의 교대제로 작업에 임하게 되며, 관역(官役)에 동원되는 기간은 계속 급료를 받았다. 관역에 동원되지 않을 때는 자율적인 생산에 종사하였다. 공장 중에는 기술 수준이 뛰어나고 정해진 작업 일수를 채운 경우 체아직(遞兒職)에 임명되어 체아록(遞兒祿)을 받을 수 있었다. 체아직을 받은 공장은 관설 수공업장의 전속 공장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관영 수공업장의 기술 수준이 민영 수공업에 비해 우월할 수 있었다.
각 관청에 소속된 경공장들은 각기 분업 관계를 기초로 제품을 생산하였다. 군기시 소속 칠장(漆匠), 마조장(磨造匠), 궁현장(弓弦匠), 유칠장(油漆匠), 생피장(生皮匠), 아교장(阿膠匠), 연사장(練絲匠) 등은 하나의 무기를 제조하는 공정의 한 단계 내지 보조적 작업을 담당하는 장인들이며, 갑장(甲匠), 궁인(弓人), 시인(矢人), 쟁장(錚匠), 고장(鼓匠) 등은 보조 작업 과정을 마친 부분품으로 완제품을 제조하는 장인이었다. 특히 야장, 주장(鑄匠), 연장(鍊匠)은 같은 제품의 공정 단계를 순차적으로 담당한 장인이어서 무기 제조 공정이 비교적 세분된 분업이 이루어졌음을 엿보게 한다.
또한 교서관에는 균자장(均字匠) 40명, 인출장(印出匠) 20명, 각자장(刻字匠) 14명, 주장(鑄匠)과 조각장(彫刻匠) 각 8명, 야장 6명, 지장(紙匠) 4명, 목장(木匠) 2명 등 모두 102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있다. 야장과 주장(鑄匠)은 금속활자의 제조를 분담하였고, 목장과 각자장은 목활자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균자장들이 식자와 조판을 하면 지장이 다룬 종이로 인출장들이 인쇄를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교서관에서의 출판 공정은 그 분업 조직이 대단히 세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작업 과정이 비교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관청 수공업에서도 비교적 수준 높은 분업 관계가 발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왕조 초기 외공장은 고려시대의 향, 소, 부곡 출신의 기술자들이 편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 소, 부곡은 조선 왕조 개창 이후 소멸되었고, 그곳의 주민들은 모두 양인으로 대우받으면서 외공장으로 편입된 것이다. 조선 왕조 초기에 경공장, 외공장에는 관노(官奴)와 사노, 향, 소, 부곡 출신 등 천인 계통의 공장도 많았지만 점차 천인보다는 양인 공장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외공장은 3,764명으로, 그중 지장(紙匠)이 700여 명으로 제일 많고, 다음이 야장(冶匠)으로 500여명에 달하였다. 지장은 충청, 경상,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고 평안, 함경도에는 전혀 없었다.
반면 야장은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종이는 관청과 상류층에 국한된 물품이었지만, 야장이 제작하는 무기와 농기류는 각 관청은 물론 농민들의 수요품이었으므로 야장은 전국에 분포하였던 것이다. 지장과 야장 외에도 무기 제조 장인인 궁인, 시인과 석장(席匠)도 많았다. 외공장도 경공장과 같이 지방 관청에 전속된 공장이 아니고 그 대부분은 민간 수공업자로서 지방 관아에 작업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동원되어 지방 관청에 필요한 물품이나 진상품 등을 생산하였다.
외공장은 경상도에 소속된 공장이 가장 많았는데, 모두 1,152명으로서 전체 외공장의 약 3분의 1에 달하였다. 그러나 군현 등에 소속되어 있는 공장들은 대부분 1명 혹은 2명에 불과하였다. 경상 감영과 병영의 야장(冶匠), 규모가 큰 고을의 석장(席匠)과 지장은 10여 명이 등록된 경우도 있다. 야장의 경우 경상 감영에 18명, 좌병영에 15명, 우병영에 14명씩 있었는데, 이 정도의 규모라면 작업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제지업이 가장 발달한 전주와 남원에는 지장이 각 23명씩 소속되어 있는데, 이 고을에서도 종이 생산 과정에서 분업 관계가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몇 개 지역의 특수한 몇 종류의 수공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 수공업은 등록된 공장이 소수이기 때문에 분업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수공업은 관영 수공업이 중심이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기술이 뛰어난 공장은 모두 공장안에 등록되었다. 관영 수공업에서 조달하는 원료나 생산 수단이 가장 우수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장 또한 가장 기술 수준이 뛰어났으므로 조선 전기에 수공업은 관영 수공업이 주도한 것이다.
15세기에 수공업을 주도하였던 관영 수공업은 16세기 이후 점차 변질되었고, 17세기에 이르면 무기 등 특수분야를 제외하고 해체되어 민영 수공업 체제로 전화되었다. 관영 수공업의 변질은 16세기 후반 군역제에서 군포 대납제(軍布代納制)로 전화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관영 수공업에서도 입역을 대신하여 장포(匠布)를 바치는 장인 가포제(匠人價布制)가 확대되었다. 그 결과 무기 등 특수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영 수공업은 점차 쇠퇴해갔다.
『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의하면 조선 전기 공장을 보유하고 있던 관청 중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사도시(司䆃寺), 예빈시(禮賓寺), 제용감(濟用監), 전설사(典設司), 장원서(掌苑署), 사포서(司圃署), 양현고(養賢庫), 도화서(圖畫署) 등에 소속된 공장은 조선 후기에 모두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관청에 소속된 공장은 총 230여 명인데 가장 많은 것이 방직장(紡織匠) 90명과 옹장(瓮匠) 52명 등이다.
『대전통편』에서는 공장을 보유한 관청의 공장 종류와 수도 『경국대전』에 비해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으며, 공장을 등록시키는 규정도 현실적으로 점차 철폐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영 수공업 공장에서 생산하던 물품들은 이제 민영 수공업 공장에서 생산되어 시장을 통해 구입하였다.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면서 민영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도 관청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관영 수공업 체제는 무기 화약류나 도자기의 제조 분야를 제외하고는 17세기 이후 동요, 해체되었다. 관영 수공업이 해체된 이후, 수공업자들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제품을 생산하였다. 특히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 이후 민영 수공업은 한층 더 발전하였다.
경공장에 의해 운영되던 한양의 수공업은 점차 민영 수공업자가 주도하였다. 조선 후기에 민영 수공업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의 장인조에는 한양의 수공업 장인으로 금장(金匠), 은장, 옥장, 두석장, 목수, 석수, 소목장, 대정(大丁: 대장장이), 조주장(造主匠), 모의장(毛衣匠), 안장장(鞍粧匠), 주자장(鑄字匠), 숙수, 각수장(刻手匠), 장책장(粧冊匠), 칠장(漆匠) 등을 꼽고 있다.
또한 수공업 작업장인 장방(匠房)으로는 금방, 은방, 옥방, 두석방, 능라방, 주피방, 궁방(弓房), 시방(矢房), 사모방(紗帽房), 각대방(角帶房), 도자방(刀子房), 안경방(眼鏡房), 석경방(石鏡房), 모의방(毛衣房), 필방(筆房), 입방(笠房), 연죽방(烟竹房)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수공업장의 위치는 대부분 종로 시전 상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편 지방의 외공장들도 대부분 관청에서 벗어나 민영 수공업장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공장 안에 등록된 외공장은 거의 사라졌다. 16세기 이후 장인에 대한 수취가 입역 대신 신역가(身役價)를 받는 장인 가포제가 확대되었다. 장인이 내는 가포는 일반 농민이 부담하는 군포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 이에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의 호적대장에는 장인수가 갑자기 크게 늘었다. 이 시기 호적대장에 등록된 장인들은 실제 수공업자가 아닌 헐역을 쫓아 장인으로 등록된 사모속(私募屬)의 한 형태에 불과하였다.
17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단성호적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단성호적에 기재된 장인의 종류는 총 40종으로, 이 가운데 사기장, 생철장, 수철장, 옹장(甕匠), 유기장(柳器匠)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호적대장에 파악된 장인수가 급감하였다고 한다. 그 까닭은 대동법 시행 이후 장세(匠稅)가 중앙에 상납하는 세가 아니라 지방 관청의 수입으로 책정되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호적대장에 장인의 수를 명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호적대장에 등록된 장인의 수는 급감하였던 것이다. 여기서도 조선 후기 지방 군현 호적에 등록된 장인들은 실제 수공업자가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