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에는 원(元)의 간섭과 그들의 지폐인 보초(寶鈔)의 유입, 그리고 대량의 은(銀) 유출로 인해 은병(銀甁)으로 대표되는 고려의 화폐 제도가 문란해졌고, 물가 급등과 상인들의 모리 행위로 유통계의 혼란이 극심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철전과 동전 등 금속 화폐의 주조와 유통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성종조에 주조된 철전과 숙종조에 주조되었던 동전은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반면 숙종조에 표인(標印 : 도장을 찍어 표시함)된 은병은 고려 후기까지 역할을 하며 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고려 후기에는 원의 간섭으로 인해 많은 은이 유출되었고, 대신 원의 화폐인 보초가 유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의 값이 급등하게 되었고, 충혜왕이 소은병을 제작하며 제도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해 고려 말기에는 고려의 화폐 제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한편, 은병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았던 포(布)는 점점 더 품질이 떨어져 옷감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인 추포(麤布)가 유통되었는데, 그만큼 고려 후기는 물가도 급등하고 유통 질서가 문란해졌다. 게다가 고려 말에는 원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지폐인 보초의 가치가 급락하며 고려 내 화폐 유통에 혼란이 오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 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화폐 제도의 실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게 되었다. 먼저 1356년(공민왕 5)에는 도당(都堂)에서 새로운 화폐 제도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은 1냥으로 은전(銀錢)을 주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1390년(공양왕 3) 3월에는 중랑장(中郎將) 방사량(房士良)이 또 다른 화폐의 유통을 건의하였는데, 이때 그는 은병이나 은전이 아닌 지폐의 유통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바로 저화(楮貨)이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도 저화의 유통을 건의하였다. 다만 두 주장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방사량의 경우 오직 저화만 유통하고 추포(麤布)의 유통을 금지하자고 주장했지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저화를 근본으로 삼고 포화(布貨)와 같이 유통할 것을 주장했다. 즉, 홍복도감(弘福都監)을 혁파해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를 설치하고, 고금의 전법(錢法)과 회자(會子) · 보초(寶鈔)의 제도를 참작해 고려통행저화(高麗通行楮貨)를 발행, 오종포(五綜布)와 겸용하면 국가 재정의 보충과 유통 질서의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미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화폐인 지원보초(至元寶鈔) · 중통보초(中統寶鈔)를 사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저화의 발행 문제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392년 4월 문하시중(門下侍中) 심덕부(沈德符), 수시중(守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자섬저화고의 혁파, 인쇄된 저화의 폐기, 인판(印板)의 소각을 거론해 저화 유통 문제는 보류되었다. 그 뒤 1401년(태종 1) 4월에 하륜(河崙)의 건의로 사섬서(司贍署)를 설치, 이듬해 1월에 저화 2천 장을 발행하였다.
저화 발행 당시 저화 한 장의 가치를 상5승포(常五升布) 1필, 쌀 2말〔斗〕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조신(朝臣)들의 녹봉 일부를 저화로 지급해 국가 보유 현물과 민간의 잡물(雜物)을 상호 교역하도록 하며, 상거래에서의 저화 이용을 강제하였다. 또한, 저화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1402년(태종 2) 4월에는 5승포 사용을 일시 금하기도 하였다.
저화는 저주지(楮注紙) · 저상지(楮常紙)의 두 종류가 있다. 저주지는 길이 1자 6치, 너비 4치이고, 저상지는 길이 1자 1치, 너비 1자 이상으로, 처음 발행 시에는 삼사신판저화(三司申判楮貨) · 건문연간소조저화(建文年間所造楮貨)라는 인문(印文)이 찍혔는데, 이후 재발행 시에는 호조신판저화(戶曹申判楮貨) · 영락연간소조저화(永樂年間所造楮貨)로 개인(改印) 되었다.
하지만 저화는 강력한 시행책이 있었음에도 잘 유통되지는 못했다. 급기야 저화 발행 이후 민심의 동요와 민생의 불안을 일으키자, 1403년 9월 사섬서를 혁파하고 저화 유통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포만 화폐로 사용되게 되었다. 하지만 1410년(태종 10)에 의정부에서 포화만을 사용하는 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하며 저화의 재발행을 주장하자, 저화의 재통용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때도 처음에는 포와 저화를 같이 사용하게 하였으나, 저화의 유통을 위해 포의 사용을 금하고, 세포(稅布)를 저화로 대신하게 하는 등 강력한 유통책을 펼쳤다.
또한 서울 · 개경에 화매소(和賣所)를 설치, 국가 보유 현물과 저화의 교환을 도모하고, 장(杖) 1백 이하의 유죄자에 대한 저화수속법(楮貨收贖法)의 채택, 공장세(工匠稅) · 행상세(行商稅) · 노비신공(奴婢身貢) 등과 같은 일부 세목(稅目)의 금납화(金納化)를 꾀하였다.
그러나 실질 가치를 중시하는 일반민의 성향과 저화 자체의 크기 · 지질에 따른 사용상의 불편, 그리고 소액 거래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명목 가치의 책정, 아울러 국가 보유물과의 교역이 영속성을 띠지 못한 점 등으로 저화 가치는 계속 하락하였다.
특히 1423년(세종 5) 경에는 저화 1장이 쌀 한 되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완책으로 같은 해에는 동전과의 겸용이 강구되었고, 1425년(세종 7)에는 동전만이 전용 화폐(專用貨幣)로 인정되게 되었다.
그러나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도 교환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1445년(세종 27) 10월 저화의 재통용이 제기되고, 그 해 12월에 동전과의 겸용이 이루어졌다.
그 후에도 저화 유통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1450년(문종 즉위년)에 저화량 조절에 의한 저화 가치의 안정책이, 세조 때에는 민간 거래에서의 저화 전용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국가 시책에도 불구하고 저화는 무용지물화되어 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포화(布貨)와 나란히 국폐(國幣)로 기재되어 저포 한 장이 쌀 한 되, 20장이 상포(常布) 한 필로 규정되었지만 법전의 규정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492년(성종 23)에는 지방에서 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1512년(중종 7)경에는 유통계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저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로 고려 말 처음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조선 개국 이후 태종 대에 본격적으로 유통이 시작되었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의 유입과 은의 유출로 은병으로 대표되는 고려의 기존 화폐 제도가 문란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 말기에는 새로운 화폐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고, 지폐인 저화 유통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는 고려 후기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를 사용한 경험을 통해 지폐 사용의 장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태종은 오랜 준비와 논의를 통해 저화를 본격적으로 발행했지만, 저화는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지폐인 저화에 신용을 부여해야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