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정부는 중통보초(中統寶鈔)의 발행 이후 재정적 압박에 시달렸다. 특히 1276년(충렬왕 2, 지원 13)에는 기존 중통보초의 발행량이 100만 정(錠)을 돌파할 정도였다. 이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하며 새로운 지폐 발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1287년(충렬왕 13, 지원 24)에 원나라는 남송(南宋) 정벌로 인해 재정 압박이 더욱 커지자 새로운 보초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흔히 지원보초(至元寶鈔)로 불리는 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鈔)를 발행하였다. 『원사(元史)』의 기록에 의하면 1287년에 발생한 적자만 66만 정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재정적 압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은과 지원보초의 교환 비율은 중통보초를 발행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1 : 2였으며 중통보초는 1/5로 값을 줄이고 추가 발행은 중지하였다.
이후 원 정부가 공식적으로 태환을 중지하고 태환 준비금을 전용(轉用)하여 지원보초의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은 점차 심해졌다. 일례로 원 성종(成宗)은 즉위년(1294)에 태환 준비금으로 비축된 93만 6950냥(兩)의 은 중에서 19만 2450냥만을 목적대로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용도로 전용하였다. 이는 보초의 신용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당시 원 황실은 오르톡(Ortoq)이라 불리던 관상을 통해서 서방과 은 무역에 몰두하였다. 이유는 서방과의 은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사적인 부를 축적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때문에 많은 은이 서방으로 유출되었고, 결국 보초의 신용 부여를 위해 준비된 은, 즉 태환 준비금까지 유출되어 보초의 신용 하락과 물가 상승을 유발한 것이다. 이는 후에 보초의 가치 하락과 제도의 부실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원보초가 유통되던 시기에는 고려에도 더욱 다양한 경로로 많은 양의 보초가 유입되었다. 예전처럼 원 황실이 고려 왕실에 지불 수단으로 많은 양의 보초를 지급한 경우가 많았다. 1301년(충렬왕 27)에는 원 황실에서 1만 정의 보초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당해년도 발행액의 1/50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었다.
이 외에도 불사(佛事)를 하기 위한 관련 비용을 지급하거나 각종 상급으로 지급된 일도 있고, 개인이 보초를 도둑맞았다는 기록도 있다. 다양한 경로로 보초가 고려에 유입되었으며, 개인적으로도 보초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후 원이 패망하고 원 보초제도가 몰락하자 고려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도 새로운 화폐제도 수립을 모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