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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11족에 속하며 은백색의 광택을 지닌 금속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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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주기율표 11족에 속하며 은백색의 광택을 지닌 금속원소.
내용

원소기호 Ag, 원자번호 47, 원자량 107.868, 녹는 점 960.5℃, 비중 10.5이다. 자연은으로서 유리상태로 산출될 때도 있지만 주로 휘은광(Ag₂S)으로 산출되며, 이 밖에 취은광(5Ag₂S ·Sb₂S₃)·농홍은광(3Ag₂S·Sb₂S₃)·담홍은광(3Ag₂S·Ag₂S₃) 등으로 소량 존재한다. 은은 금속상으로 금과 합금상태로만 산출되며, 그 밖에 납·구리·아연 등의 광물에 함유될 때가 많다.

은은 은백색의 광택을 띠며 금속 중 전기 및 열의 전도도가 가장 크고 전성(展性)·연성(延性)이 금 다음으로 크다. 황(S)과 염소(Cl)와는 작용하기 쉽고 공기 중에서는 표면에 황화물이 형성되어 흐려진다.

질산과 따뜻하고 진한 황산에는 녹아서 질산은·황산은을 만든다. 은은 화폐로 쓰이는 것 외에 장식품·식기·합금용 등에 쓰이고 사진공업재료로서 쓰이기도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와 ≪오주서종박물고변 五洲書種博物考辨≫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은의 제련은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납광석을 사용하여 은을 제련, 분리하는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에 의하여 처음 실시되었으며, 은의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 정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생은(生銀)을 채취하려면 용로(鎔爐)를 파고 그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열화(烈火)를 쌓고 용로 속에 먼저 납조각을 놓은 다음에 생은을 그 위에 깔아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숯불을 피운다. 그 위에 아름드리 소나무로 덮어 불을 일으키면 납은 먼저 녹아서 아래로 내려가고, 생은은 빙빙 돌아 용솟음치면서 녹아서 용화(熔化)되어 신구연수(新舊鉛水)가 교반되며, 갑자기 표면 한가운데가 갈라지면서 은은 윗면에 모이고 연재(鉛滓)는 잿속에 스며든다.

거기에 물을 뿌려 연판(鉛版)이 응고하면 집어내고 다시 잿속에 스며든 연재를 용로에서 녹이면 재는 없어지고 납만 남는다. 이 방법은 조선 특유의 방법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제련법과 다른 점이 많으나 역시 회취법(灰吹法)이라는 것은 같다. 이렇게 제련된 단천은은 중국 은이나 일본 은보다 순도가 훨씬 높았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은생산은 대부분 금광·동광·연광에 수반하여 생산하고 있으며, 습식(濕式)으로나 건식(乾式)으로나 금을 생산할 때 은도 회수된다.

은의 제련을 위하여 쓰이는 방법으로는 염화법(鹽化法)·혼홍법(混汞法)·청화법(靑化法) 등이 있다. 염화법에는 염화배소법(鹽化焙燒法)과 염화-아말감법이 있다.

염화배소법은 우선 배소하여 은을 염화은(AgCl)으로 만들어 소금물 또는 티오황산나트륨(Na₂S₂O₃)에 담가 우려내고 용액에서 금속구리·황화나트륨(Na₂S)·황화칼슘(CaS₂) 등으로 은을 침전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는 은을 70∼85% 정도 얻어낼 수 있다. 염화-아말감법에서는 황화은(AgS)이 직접 아말감(Amalgam:백금·철·니켈·망간·코발트 등을 제외한 다른 금속과 수은의 합금)이 되지 않으므로 염화하여 아말감으로 만든다.

광석에 소금물과 황산동을 넣어서 가열하면 은이 염화물로 되고 여기에 수은을 넣으면 은은 아말감이 되어 포수(捕收)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는 은을 85% 정도 얻어낼 수 있다. 혼홍법은 금·은은 수은과 합금되어 아말감을 만들기가 쉬우므로, 이 아말감을 가열하여 비등점이 낮은 수은(357℃)을 휘발시켜 금·은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은이 휘은광(輝銀鑛)으로 존재할 때에는 아말감을 만들지 않으므로 이 방법으로는 채취할 수 없다.

오늘날에 은광을 처리하는 데에는 청화제련방법이 주로 쓰이고 있다. 광석의 종류에 따라 청화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도 있으나 비중선광(比重選鑛)·배소법을 병용하여 처리할 수 있다. 광석을 전부 미세하게 분쇄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전니청화법(全泥靑化法)이라 하며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전니청화법은 광석의 90% 이상이 200메시(mesh) 이하가 되도록 마광(磨鑛)하여 이광처리법(泥鑛處理法)에 준하여 처리한다. 광립이 미세하기 때문에 금·은이 유리상태로 되어 용해가 빠르고 마광기에서 물 대신 청화액을 쓰므로 용해가 시작된다. 이 방법으로는 은을 80% 정도까지 얻어낼 수 있다.

용융법(熔融法)은 여러 광물이 혼합되어 있는 광석덩어리를 용광로에서 처리하여 얻은 조지금(粗地金)을 얻어내는 방법인데, 지금 중의 은을 분리하여 정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전해분은법(電解分銀法)으로 조지금을 양극(陽極)으로 하여 은만을 용해시켜 금을 남기고 음극(陰極)에서는 순은(純銀)을 석출시킨다. 이 방법으로는 99.95∼99.98% 순도의 은이 얻어진다.

은의 역사는 동·금과 더불어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우리 나라의 금속공예는 전 세기까지의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하여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금속장식품 중에서 특히 금·은세공품들은 당시 은을 이용하는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해 준다. 금·은세공품이 출토되는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은을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1177년(명종 7)에 주성(鑄成)한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垸), 그 1년 뒤에 제작된 금산사향로(金山寺香爐) 등은 간결하고 균형 있는 모양과 은사입(銀絲入)의 우아한 문양으로 유명하다.

또한 1214년(고종 1)에 만들어져 건봉사(乾鳳寺)에 있던 동제은상감향로(銅製銀象嵌香爐), 고려 말기인 1344년에 만들어진 봉은사(奉恩寺) 소장 청동루은향로(靑銅縷銀香爐)와 1346년에 만들어진 동제은입사향로(銅製銀入絲香爐) 등은 고려 금속향로의 대표작품으로서 그 주조기술이 매우 우수하였다.

1098년(숙종 3)에는 은병(銀甁)이라는 일종의 은화가 주조, 통용되었으니 당시의 정교한 기술과 세련된 야금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고려 전기에는 은광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거듭되는 전란과 금속광의 채굴, 야금에 관한 행정적 정책의 빈곤으로 서서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태종대에 들어서면서 황해도에서, 1401년(태종 1)에는 김해·청도 등에서 각각 은을 채취해 보았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1407년에 중지하게 하였다고 하며, 이는 은을 채취하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1413년에는 각 도 감사로 하여금 수령관(首領官)을 파견하여 채방사(採訪使)와 함께 도내의 금·은 산지를 탐사하도록 지시하기에 이르러 태종·세종대에는 광산개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은 산지로는 평안도의 태천·운산, 황해도의 곡산·불산·서흥, 경기도의 시흥, 경상도의 안동·청도·김해 등지가 그 중 가장 유명한 곳들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큰 곤란의 대상이었던 금·은의 사대세공(事大歲貢)이 1430년(세종 12)에 면제를 받게 된 결과 광업개발의 소극화 정책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하여 귀금속의 취련·가공기술에서 뿐만 아니라 제련기술마저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1503년(연산군 9)에 김감불(金甘佛)이 김검동(金儉同)과 함께 단천의 금·은·납 광맥인 연철(鉛鐵)에서 은을 분리하는 새로운 은의 제련법을 발명함으로써 단천은 은 산지로 변모하였으며, 영흥 등 많은 납 산지에서도 은을 제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단천은광의 채굴문제에 대하여는 공조판서 정미수(鄭眉壽)가 민채안을 제시하여 1503년에 납세채은제(納稅採銀制)에 기초한 민채가 허용되었으나 곧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는 조처의 일환으로 단천은광도 폐쇄되었다. 그 뒤 1516년 중종 때 군사재원 조달을 위해 단천은광이 재개되었다가 중국의 공은(貢銀)을 재촉시킨다 하여 다시 봉쇄당하였다.

또한, 자국산 은의 생산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광산은 봉쇄시키고 1539년 이후 도리어 일본 은이 유입되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은산(銀山)의 민영이 다시 허가되었으므로 1651년(효종 2)에는 주화정책이 재개되어 주화재료로서 은이 곳곳에서 산출되었고, 은산 채굴장인 은점(銀店)을 허가하여 처음으로 세수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관영·민영으로 반전을 거듭하여 숙종·영조에 이르기까지 쇠퇴일로를 걸어 폐점하는 곳이 늘어났다.

근대에 와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은을 공업적으로 생산하게 된 것은 1915년 평안남도 진남포제련소에 비철건식제련공장이 건설되면서이고, 1935년 장항제련소의 발족 이후 은전해법을 도입하기까지의 약 40년간 동전해(銅電解) 후 슬라임(slime:차진 흙, 점액)에서 금·은을 생산하였다.

1960년도 연간 100㎏ 이상의 은생산광산은 월류광산(月留鑛山)·무극광산(無極鑛山)·구봉광산(九峰鑛山)·덕은광산(德隱鑛山)·다덕광산(多德鑛山)인데, 모두 금을 위주로 한 금광산에서 회수되었다. 인천광역시 부평에 소재하는 부평 은광산은 영품실업주식회사의 소유인데, 1969년에 생산을 개시하였으며 부선정광(浮選精鑛)을 청화제련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1974년에 온산대단위 동제련소(LG금속)가 설립되어 1979년에 준공, 1981년에 금·은을 전해해서 은을 회수하기 시작하여 1981년에는 56t을 생산하였다. 또한 고려아연(주)도 1974년에 설립하여 1986년 11월에 첫 생산을 시작하여 1987년에는 59t의 은을 생산하였다.

계속된 설비능력의 신설, 확장 개선과 대형화로 증가일로에 있으며, 1999년 현재 우리 나라의 은 생산규모는 LG금속(주)가 연산 180t의 생산능력으로 80∼100t을 생산하고 있으며, 고려아연(주)가 연산 400t 규모로 300∼320t을 생산하고 있다.

제련법은 양사가 뫼비스법(Moebius Process)을 채택하고 있으며, 99.99% 순도의 은을 얻고 있다. 2000년대의 우리 나라의 비철금속공업은 바야흐로 약진기로 접어들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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