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매개물이다. 화폐가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화폐에 대한 신뢰, 상품경제 및 상업의 활성화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화인 종이화폐와 동전은 실용가치를 지닌 쌀이나 베 등의 물품화폐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회변동이 화폐경제의 전반적 여건을 조성한 이후에야 상평통보를 기반으로 한 화폐경제의 확대보급 추세가 가속화되었다. 현대의 화폐경제는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한국은행이 출범하면서 시작되었다.
화폐는 가치척도 · 지급수단 · 가치저장 · 교환기능 등을 가지고 있다. 물물교환시대에는 조개껍데기 · 곡물 · 베 등이 물품화폐로 사용되다가 금 · 은 · 동 등이 화폐로 주조되어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강제통용력이 인정된 지폐나 주화가 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선사시대의 교환수단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자급자족적 경제생활단계를 지나서 물물교환이 지배적이었고, 무기와 각종 생산기구 · 장신구 · 가축 · 곡물류 등이 물품화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철을 생산하여 교환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에서는 철을 생산하여 일본까지 수출하였고, 중국의 전화(錢貨)처럼 철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옥저에서는 금 · 은으로 만든 무문전(無文錢), 즉 문양이 없는 금은전(金銀錢)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이 증진되고 야금술을 비롯한 수공업기술의 수준이 향상되었음은 물론, 상업도 발달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쌀 · 조 · 보리 등의 곡물류와 베[布] · 모시 · 비단 등의 견직물 · 마직물이 국가에 대한 세납(稅納)과 지출수단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일반 유통계에서는 물품화폐로서 통용되었다. 또한, 금 · 은과 같은 귀금속과 철 등이 일종의 칭량화폐(稱量貨幣)로서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 · 은 세공기술 등을 비롯한 수공업기술 전반이 비교적 발달한 신라에서는 금 · 은 무문전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 내용이 없어 그것의 주조(鑄造) 내지 유통실태 등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한편, 이상의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던 시기에 일찍이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 중국 각 시대의 여러 종류의 화폐가 한반도로 흘러들어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 고대 화폐로서 명도전(明刀錢)과 포전(布錢)은 물론 한사군시대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한(漢)나라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왕망시대(王莽時代)의 화폐 등이 한반도의 각 지방에서 출토된 사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과의 제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고, 문물교섭과정에서 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 등 중국화폐가 다량 유입된 사실을 기록이나 출토된 화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화폐가 일부 계층이나 극히 한정된 유통계에서 사용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국가가 정책적으로 화폐유통을 시도할 만큼 큰 영향은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한시대에 교환수단으로 사용한 철이나 동옥저와 신라에서 사용한 금 · 은 무문전 등은 사실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그 품질 · 체재 및 무게를 규격화해서 만들어 사용한 화폐였다기보다는,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유통이 지배적인 원시자연경제체제에서 통용된 자연발생적 교환수단, 즉 실용성을 전제로 한 물품화폐와 본질적으로 성격을 같이하는 칭량화폐였다 할 것이다.
우리 나라 화폐사상 국가가 정책적으로 원시자연경제체제하의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 유통질서를 극복하고 품질 · 체재 및 무게를 규격화한 화폐를 주조, 유통시키려 한 최초의 시도는 996년(성종 15)에 철전(鐵錢)을 주조, 유통시키려 하였던 때이다. 이렇게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을 위해 철전을 주조, 유통하게 된 시대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려는 전기에 토지제도를 개편하고 조세체계를 정비하여 국가재정 기반을 어느 정도 굳힐 수 있었다. 그리고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진되고, 따라서 그만큼 상품생산 내지 그것의 유통도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국내 상업조직의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개경의 특권적 좌상(坐商)인 시전(市廛)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고려 개국 초에 국가에서 설치해 어용상업을 경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대외무역은 송나라를 비롯한 거란 · 여진 · 일본 등을 상대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당시 개경에는 많은 외국상인들이 내왕하였을 만큼 국제무역은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사회경제적 여건하에서 일찍부터 당전(唐錢)과 송전(宋錢) 등 중국화폐가 유입되었으나 주로 송나라나 일본과의 무역 결제수단(決濟手段)으로 사용되었을 뿐 일반 유통계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못하였다. 일반 유통계에서는 주로 쌀과 베 등 물품화폐와 금 · 은 등 귀금속이 칭량화폐로 통용되었다.
한편, 고려왕조는 건국 이후 광종 때부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 강화하기 시작해, 그것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0세기 말 성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정비강화 과정에서 중요한 국가경제정책으로서 의창(義倉) · 상평창(常平倉)의 설치와 함께 무게 · 품질 및 체재를 규격화한 철전을 법화(法貨)로서 주조, 유통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통치체제를 중앙집권적인 것으로 정비, 강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소요되는 국가재정을 염출하기 위해 명목화폐를 만들어 사용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고, 또한 국가의 중요한 경제권의 하나인 화폐에 대한 지배권을 중앙에서 장악하기 위해서도 민간인에 의하여 생산되는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주화를 법화로 주조, 유통시킴으로써 화폐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가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고려왕조는 996년에 철전을 주조하여, 그 이듬해부터 1062년(문종 16)까지 통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철전은 대도시 유통계의 일부에서 통용되다가 베와 쌀 등 물품화폐에 압도되어 점차 화폐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다시 1097년(숙종 2)에 이르러서는 법화로서 주화의 주조유통문제가 제기, 논의되어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주조관계 업무를 담당 수행하게 하고, 1102년에 해동통보(海東通寶)의 유통보급을 시도하였다. 이후 고려왕조는 해동통보를 비롯한 동국통보(東國通寶) · 동국중보(東國重寶) · 해동중보(海東重寶) · 삼한통보(三韓通寶) · 삼한중보(三韓重寶) 등 각종 주화(동전)를 주조, 유통시키려 했다.
동전의 주조 · 유통을 시도하기 시작한 숙종연간에 “국인(國人)이 처음으로 용전(用錢)의 이로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각종 동전 역시 국내에 유입된 중국화폐 및 철전 등이 그랬던 것처럼 통용범위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는 데다가 실용가치가 전제된 쌀 · 베 등 물품화폐에 구축되어 화폐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각종 동전, 즉 명목화폐를 법화로 주조하여 그것을 상거래의 매개수단으로서, 또는 관료나 군인의 녹봉으로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화폐유통정책을 추진하면서 1101년에 귀금속화폐로서 일종의 칭량은화인 은병(銀甁)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려시대 화폐정책 추진과정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실로서, 해동통보 등 각종 동전을 주조, 유통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숙종 때에 속칭 활구(濶口)라고 하는 은병이 주조, 유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당시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와 함께 지은형태(地銀形態)로 사용되던 칭량은화를 극히 미숙한 형태이기는 하나 법화로서 품질과 체재 등을 규격화하는 단초적 조처로서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은 1근을 당시의 국토 모양을 본떠서 주조하였다는 은병은 통용 초기에 있어서는 칭량화폐로서 일정한 통용가치가 보장되었던 것이나, 뒤에 품질이 조악한 위조 은병이 나타나자 그 가치는 떨어졌다. 고려왕조는 은병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자 그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처로서 은병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1331년(충혜왕 1)에 소은병(小銀甁)을 주조, 유통시켰다.
그러나 이 소은병 역시 위조행위가 성행하여 은병인지 동병(銅甁)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 품질이 조악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역시 칭량은화로서 쇄은(碎銀)을 사용했으나, 그것도 동이 합주(合鑄)되어 품질이 나빠져서 14세기 중엽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 같다.
쇄은은 은병과는 달리 품질과 체재 등이 일정하게 규격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것의 통용은 국가의 화폐정책 시행면에서 볼 때 후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상과 같이 고려왕조는 철전이나 동전 등의 비금속화폐(卑金屬貨幣)에 법적 통용력과 경제적 신용을 부여하여 법화로서 유통시키려 했다. 그와 같은 명목화폐 유통정책이 실패하자 비금속화폐의 한계를 보완하여 은병이나 쇄은 등의귀금속화폐를 주조, 유통시키했다.
그러나 귀금속화폐도 그 품질과 체재 등이 점점 조악해졌음은 물론 희소하고 소액거래가 불편한 점 등 화폐의 중요한 구성요건인 보편성이 결여되어 일반 유통계에서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대외무역거래에서나 일부 부유층의 부의 축적수단으로 사용되는 데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조가 물물교환이나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을 목적으로 추진한 금속화폐의 유통정책이 좌절되자, 일반 유통계는 쌀이나 베 등의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통계를 지배하는 물품화폐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베, 즉 포화(布貨) 역시 품질이 떨어져 유통가치가 하락됨으로써 물가의 등귀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품질 나쁜 추포(麤布)의 화폐기능이 둔화됨으로써 유통계에 나타난 경제적 혼란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더욱이 고려 말에는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강력한 원나라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해서 국내에 유입, 통용되어 금 · 은 등 귀금속과 함께 원나라와의 경제적 거래의 결제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유통계 내지 사회경제적 여건을 배경으로 해서 1391년(공양왕 3)에 추포의 통용을 금지하는 동시에 저화제(楮貨制)를 채용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그 이듬해에 송나라의 회자(會子)와 원나라의 보초제(寶鈔制)를 모방하여 저화(楮貨)를 인조(印造), 5승포(五升布)와 함께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와 같이 저화제를 채용하는 화폐제도의 개혁은 실질적으로 이성계(李成桂) 등의 신진세력에 의하여 사전(私田)이 혁파되고 과전법(科田法)이 실시된 것과 거의 동일한 국가재정적 내지 경제정책적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귀금속화폐의 유통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철전이나 동전 등 비금속화폐가 지속적으로 통용되지 못한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하에서 한갓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은 저화가 국가에서 부여한 액면가치(額面價値)대로 통용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려왕조가 저화제를 채용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송나라와 원나라에서는 회자와 보초 등의 지폐가 원활히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았다.
즉, 당시의 고려왕조는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원나라의 직 · 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10만 정(錠) 이상의 보초가 국내에 유입, 통용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왕조가 실제성이 적은 저화제를 채택, 실시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또한,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의 창건을 꿈꾸던 이성계 등의 강렬한 혁명적 의지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저화제의 채용을 결정하게 된 동기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저화제는 당시의 미숙한 사회경제가 수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화폐제도였고, 또한 고려 · 조선 교체기의 과도기적 혼란이 겹쳐 저화는 인조되고도 통용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저화제 실시의 중단은 고려왕조가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는 원시자연경제적 유통질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도한 화폐제도개혁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대외관계의 불안을 극복하고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1392∼1592)에는 제반 문물제도를 중앙집권적으로 정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지배적 유통질서인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저화 및 동전의 유통을 시도하였다.
또한,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그에 대한 반동 내지 미봉적 조처로서 당시의 유통계를 지배하던 물품화폐, 즉 베[布貨]를 법화로 하거나, 역시 실용가치가 전제된 전폐(箭幣)를 법화로서 주조, 유통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가 고려시대에 실시하였던 것처럼 물품화폐의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서 유통시키려 하였던 동기 또는 그 시대적 배경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다. 고려왕조가 10세기 말 이후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화폐유통정책을 거듭 시도했던 사실은 조선 전기에 저화나 조선통보(朝鮮通寶)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조선왕조는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킴으로써 국가의 궁핍한 재정을 보완하고 국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저화나 동전을 유통시킴으로써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고 민식(民食)을 풍족히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중앙집권적인 조선왕조는 국가의 중요한 이권인 화폐에 대한 일체의 지배권을 국왕 또는 중앙정부에서 완전 장악하기 위해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려 하였는가 하면, 베와 같은 물품화폐를 법화화하려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의 직접 · 간접적 영향은 조선 전기에 각종 명목화폐의 통용을 시도하게 된 동기의 하나였다.
끝으로 조선왕조가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가 갖는 화폐기능의 한계를 느끼고 명목화폐를 필요로 하는 사회경제적 요청에 부응하여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려 하였으리라는 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관영상공업(官營商工業)이 지배적이던 조선 전기에 있어서 활발한 생산활동과 상업활동, 그리고 상품경제 · 교환경제의 원활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여건하에서 물품화폐기능의 한계를 느끼고 명목화폐 통용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이 그렇게 절실한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상인의 매점적 도고활동(都賈活動)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또한 실용가치가 없는 품질 나쁜 베, 즉 추포의 통용을 법으로 금지하는데도 그것이 계속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던 당시의 상업계 내지 사회경제가 내포한 잠재력, 다시 말해서 화폐의 수용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몇 가지 사실을 직접 · 간접적 동기 또는 배경으로 해서 조선왕조는 우선 저화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401(태종 1)에는 고려 말에 시도하다가 그친 저화를 법화로 통용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저화통용에 대한 업무를 담당할 기관으로서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저화를 인조하여 포화, 즉 베와 병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반민중은 실용가치가 보다 큰 베를 선호하고 국가가 통용을 권장하는 저화의 사용을 기피했다. 이에 정부는 저화로 민간이 소유한 금 · 은 · 목면(木綿)을 매입해 저화의 구매력을 강화하고 국가가 보유한 쌀을 방출하여 저화를 환수함으로써 저화의 공신력(公信力) 내지 태환력(兌換力)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에도 불구하고 일반민중은 추포를 계속 화폐로 사용하고 저화의 사용을 기피하게 되자, 서울과 지방에서 베의 사용을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격히 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물품화폐인 베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저화의 유통을 원활하게 할 수 없었다. 저화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자 유통계에서 저화는 사라지고 일반민중은 베만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1403년 9월 저화의 통용을 일단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뒤 베만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추포를 화폐로 사용하는 것은 낭비에 속하고 그 운반이 불편하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포화제(布貨制), 즉 베를 화폐로 사용하는 제도의 불합리성이 거론되어 1410년 5월에 다시 저화를 법화로 사용할 것을 결정했다.
뒤이어 저화를 국가에 대한 각종 세납에 사용하게 하는 한편, 5승포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저화를 유통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의 화폐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그 보완책으로서 1423년(세종 5) 9월에는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하는 문제를 결정하게 되었다.
동전, 즉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저화와 병용하자 상대적으로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는 등, 그것의 유통추세는 더욱 위축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서 동전 역시 상당량이 퇴장되거나 가치변동이 심해져서 일반 유통계에서 법화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445년 12월 동전유통책의 실패에 대비하여 저화를 다시 유통시키기로 하여, 뒷날 『경국대전』에 저화가 포화(베)와 함께 법화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저화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미숙성이나 원료의 공급난 또는 화폐정책 자체의 모순성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16세기까지 극히 한정된 일부 유통계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저화를 법화로 사용하였던 사실은, 조선 후기 화폐정책의 입안과 시행과정에서 종종 역사적 선례로서 참고, 활용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 정부가 저화 못지않게 법화로서 적극 유통보급 시키려 했던 것은 동전이었다. 동전의 주조 · 유통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394년이었다. 그러나 동을 비롯한 원료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동전은 주조, 유통되지 못하고, 초기부터 저화를 인조하여 법화로 유통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1415년에 동전의 주조유통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당나라의 개원오수전(開元五銖錢)을 모방하여 조선통보를 법화로서 주조, 유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저화와 병용하기로 했던 정책결정은 한해(旱害)로 민심이 동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실현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 142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1402년부터 통용된 저화의 유통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여 저화와 병용하기로 하였다.
당시 정부는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모방해서 조선통보를 주조, 유통시키기로 했는데, 동전주조업무는 사섬서에서 관장하였다. 중앙에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으나, 다량의 동전을 단시일 내에 주조, 발행할 수 없어 연료나 화폐원료 및 노동력의 공급사정을 고려하여 각 지방에도 주전소(鑄錢所)를 증설, 동전을 주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폐원료를 거의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던 당시에는 원료의 절대량 부족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화폐정책 추진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동전을 충분히 주조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저화의 유통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여 저화와 병용하게 되자, 저화는 일반 유통계에서 사라지고 겨우 조세의 납부수단으로서만 사용되었다.
1425년 4월에 이르러 마침내 저화의 통용은 중단되고 동전만 사용되었다. 이로써 각도의 세공저화(稅貢楮貨)를 비롯한 각종 세납을 동전으로 납부하게 하고, 동전으로 바치지 않는 자를 처벌하는 등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동전의 유통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일반백성은 대체로 화폐가치를 그것의 실용성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별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어 당시 일반 유통계는 베나 쌀 등 물품화폐가 지배하고 있었다. 일반백성이 동전의 사용을 기피하고 베나 쌀 등 물품화폐만을 즐겨 사용하게 되자, 1426년 2월부터 이른바 잡물(雜物)의 통용을 묵인하였다.
정부가 동전유통정책의 실패를 깨닫고 각사(各司)가 보유한 베 · 쌀 등이나 해산물을 시가(時價)로 방출하고, 국가보유의 동전을 가지고 민간 소유의 잡물을 구입함으로써 법화로서의 동전의 구매력 내지 태환력을 강화하고 보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전의 유통보급방법도 국가가 방출할 물자량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시도될 수 없어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저화나 동전 등의 명목화폐를 법화로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그것에 대한 보완 내지 반동적 조처로서 일찍부터 일반 유통계를 지배해온 대표적 물품화폐인 베, 즉 포화를 법화화하고자 하였다. 베는 역사상 일찍부터 물품화폐로 통용되었던 것으로서, 그것이 우리 나라의 화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이와 같은 포화는 조선 전기에도 그 이전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일반 유통계를 지배하였고, 일본 등 외국과의 교역의 결제수단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5세기 말엽에 편찬, 공포된 『경국대전』에도 국가의 법화로서 포화를 저화와 함께 통용할 것을 규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포화는 쌀과 함께 조선왕조가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시기에 있어서도, 그 당시의 유통계를 지배하는 물품화폐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포화를 법화화하려는 화폐정책과 본질적으로는 성격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철촉(鐵鏃)을 법화로서 사용하는 정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즉, 세조 때에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화시에는 화폐로 사용한다는 목적에서 화살촉 모양의 이른바 전폐[柳葉錢]를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제반 사회경제적 발전이 저화나 동전과 같은 명목화폐가 저항 없이 수용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포화나 전폐와 같은 물품화폐의 통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해 추진한 화폐정책의 부진 내지 실패를 보완하거나, 또는 그 반동적 조처로서 취해진 물품화폐의 법화화 시도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 전기에 베나 쌀 등 물품화폐의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 ·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하여 추진한 화폐정책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사회경제적 제반여건의 미비, 화폐원료의 공급난, 화폐정책 자체의 모순성 등이 직 · 간접적 원인이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고려왕조가 역사상 최초로 철전을 주조, 유통하려 했던 10세기 말부터 16세기 말, 즉 임진왜란 이전까지에 이르는 6세기 동안에는, 그 사이에 왕조의 교체가 있었으나 명목화폐의 수용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회경제의 본질적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상 6세기간에 걸쳐 고려 및 조선왕조가 시도한 명목화폐 유통정책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 할지라도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았다. 당시에 축적된 명목화폐 유통정책에 대한 역사적 경험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 동전, 즉 명목화폐가 법화로서 유통되는 데 긍정적 요인으로 기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고려왕조와 조선 전기를 포괄하는 시기를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시도기라 한다면 조선 후기(17세기 초엽∼19세기 중엽)는 명목화폐제도의 확대시행기로 볼 수 있다. 화폐발달사상 조선 후기에 국가가 명목화폐인 동전을 법화로 채택, 유통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봉건사회의 전통적 관영상공업체제는 와해된 반면 사영수공업(私營手工業)과 자유상업(自由商業)의 발전은 급진전되었다.
둘째,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특권층의 토지겸병 또는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어 특수계층에 의한 토지광점(土地廣占) 내지 대토지경영(大土地經營)의 가능성이 증대되고, 영리위주의 상업적 농경이 보급되었다.
셋째, 전통적으로 농민층의 부역노동에 의존해 온 봉건왕조의 관영광업체제(官營鑛業體制)가 해체되어 민간인이 자본을 투입, 광업경영에 참여하는 민영화방안이 시도되었다.
넷째,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봉건적 사회신분질서(兩班 · 中人 · 常民 · 賤民)의 혼란으로,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통적 생업관(生業觀:士 · 農 · 工 · 商)은 변질되고, 농업중심 경제구조의 보완을 위해 부분적으로 상공업진흥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다섯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의 인구급증현상은 당시 봉건사회의 제반 사회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증가된 인구를 수용할 새로운 생산양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섯째, 상품경제와 교환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해서 실시된 대동법이 확대 시행됨에 따라서 조세체계가 단순 · 합리화되는 동시에 봉건사회의 상품생산 내지 유통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일곱째, 청나라 및 일본과의 무역이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어 국내의 제반 사회생산력의 증진 내지 상품경제 · 교환경제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여덟째,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 받은 화폐통용에 대한 자극은 지식계층의 화폐유통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켰다.
아홉째, 청나라의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문명의 영향을 받아 윤리지향적 가치체계가 실용성 · 실증성과 객관성 ·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논리지향적 가치체계로의 전환이 촉진되고, 새로운 사회사조(社會思潮)로서의 실학이 학문적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본질적 변화를 촉진한 양란을 겪으면서 상품경제 · 교환경제의 발전이 급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는 화폐로서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명목화폐인 동전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은 절실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요청에 부응하는 동시에 직접적으로는 국가재정수요를 충족시킴으로써, 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게 되었다. 정부는 제반 사회경제적 여건을 배경으로 해서 임진왜란 후, 즉 17세기 초부터 명목화폐인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화폐유통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전을 주조해야 했으나, 그 초기에는 조선 전기에 주조되었던 동전을 우선 유통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화폐유통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량의 동전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화폐를 주조, 발행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17세기 초부터 1650년대 말까지는 별도로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하거나 중앙관서 및 군영(軍營)에서는 물론 개성 · 수원 · 안동 등 각 지방관청으로 하여금 화폐를 주조하게 하였다.
한편, 화폐주조사업의 소요경비 절감을 위해 민간인에게 화폐주조를 허가해주거나 싼 값으로 중국동전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전반기에는 조선통보와 십전통보(十錢通寶)를 주조, 유통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에 주조된 조선통보 및 중국동전 등 여러 종류의 동전을 유통시켰다.
1650년대 말에 중단되었던 화폐유통정책을 1678년(숙종 4)에 다시 실시하면서 상평통보(常平通寶)라고 하는 동전을 주조, 유통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상평통보는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 필요할 때마다 각 중앙관서 · 군영 및 각 지방관청에서 주조, 발행되었다.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려는 정책으로, 우선 화폐유통문제를 중요한 정책적 과제로 생각하고 국가가 주조, 발행한 화폐는 계속 통용되리라는 점을 국민에게 강조하여 화폐정책에 대한 민중의 불신감을 해소, 극복하고자 했다.
또한, 동전을 매개로 한 상품의 매매거래와 국가 수입지출의 화폐화를 통해서 민중의 화폐에 대한 가치인식을 심화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추포와 같은 물품화폐의 통용을 금지하거나 칭량은화의 사용을 억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동전의 유통영역을 확대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정유재란 · 병자호란과 같은 외침, 사회경제발전의 미숙성, 화폐원료의 공급난 및 화폐정책의 불합리한 운용 등이 직접적 · 간접적 원인이 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단된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40년대에는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강화 · 교동(喬桐) · 풍단(豊湍) · 연백(延白) 등 인근지방에서 동전이 원활히 유통되고, 165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국경과 인접하여 국제무역이 발달한 의주 · 안주 · 평양 등지에서도 동전은 통용되었다. 그리고 1670년대 말에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시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화폐경제의 확대보급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상평통보, 즉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중세적 전통사회질서의 해체를 수반하는 화폐유통에 대한 보수적 반동이나, 또한 화폐의 공급부족현상으로서의 전황(錢荒)과 같은 저해적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애 내지 저해적 요인은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는 당시 사회의 근대(近代)를 향한 역사의 흐름을 억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16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물품화폐와 칭량은화의 유통이 지배적인 봉건사회에 명목화폐인 동전이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의 유통기반을 이룩하게 되었다.
동전이 초기의 유통보급단계를 지나 일반적 가치척도 · 교환수단 · 지불수단 및 가치저장수단 등 제반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되자 호조 등 중앙관서와 지방관청, 그리고 각 군영의 비축(備蓄)과 수입지출의 화폐화비율(貨幣化比率)이 높아지고, 소작료 · 노임의 화폐화가 증진되었다.
또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이 보다 유통성향이 큰 화폐자본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토지 · 노비 · 가옥 · 가축 등에서부터 시장의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동전을 매개로 하여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20년대 이후에는 북쪽으로 회령, 서쪽으로 의주, 남쪽으로 동래와 제주도에서도 동전이 통용되는 등, 유통영역은 국내 각 지방으로 확대되고 각 계층의 화폐에 대한 가치인식은 심화되었다.
따라서 1730년대부터는 상평통보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순화폐유통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어, 고액전(高額錢)을 주조, 유통시키는 문제와 함께 금화 · 은화를 주조하여 동전과 병용하자는 주장이 지식계층에 의하여 제기, 논의되었다. 181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근대 금 · 은본위제와 근사한 화폐제도의 개혁방안이 구상, 제시되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는 악화(惡貨) 당백전(當百錢)을 남발함으로써 심각한 화폐제도 내지 유통질서의 혼란이 있었지만, 마침내 봉건 조선왕조의 전근대 화폐제도, 즉 단순소박한 단일법화유통체제는 극복되기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후, 즉 17세기 초부터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 1670년대 말부터는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의 유통이 지배적이던 당시 사회에 명목화폐인 동전이 널리 유통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첫째, 화폐의 유통으로 국내외의 상업발달 내지 화폐자본화한 상업자본의 성장이 촉진되고,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증대되었다.
둘째, 화폐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동을 비롯한 화폐원료의 수용량이 급증하여 조선 후기에는 화폐원료의 공급을 목적으로 각 지방의 동광이 적극 개발되었는데, 동광개발경영면(銅鑛開發經營面)에서 근대자본주의의 싹이 엿보인다.
셋째, 화폐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화폐의 절대수요량은 급증하였고, 이에 대규모적인 화폐주조법을 빈번히 개설하여야만 하였다.
따라서, 화폐주조법은 공장제수공업체제로 관리경영되었고, 주조기술의 정예도나 공정의 분업화면에서는 물론 규모와 개설빈도(開設頻度)에 있어서 당시의 금속수공업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넷째, 화폐자본화한 고리대자본의 성장이 촉진되었고, 이와 같은 자본이 농촌사회에 침투되자 농민의 몰락 내지 농촌사회의 분화가 급진전되었다.
당시 농촌사회의 분화과정은 상업자본의 침투와 화폐경제의 확대보급으로 심화된 지방관리의 농민착취로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농촌사회의 분화과정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즉, 다수 임노동자(賃勞動者)가 창출되었고, 특수계층에 의하여 광점(廣占)된 대토지는 농업기업화의 전제가 되었으며 보다 많은 이윤추구를 위한 상업적 농경이 확대보급되었다.
다섯째,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수입지출은 물론 소작료 · 노임 등의 화폐화비율이 증진되었다. 또한, 일반민중의 일상생활에서 거래가 점차 화폐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국가경제의 관리운용이나 일반민중의 경제생활의 객관화 내지 합리화 경향이 증진되었다.
여섯째, 성리학을 지배원리로 하는 전통적 사회윤리가 급격히 변질되었다. 화폐제도의 확대보급으로 촉진된 농촌사회 분화과정에서 관리의 농민착취가 심해졌고 몰락농민의 수도 급증하여, 이들이 주축을 이루는 도적행위나 반체제활동은 심각한 사회불안의 요소가 되었다.
일곱째, 화폐제도가 확대보급됨에 따라 일반민중의 소비 · 사치성향과 투기 · 사행심이 조장되고, 이로 말미암아 절약과 검소가 생활미덕으로 강조되던 전통적 경제윤리의 변질이 촉진되었다. 일부 양반층은 축재와 식리(殖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농민들은 토지를 이탈, 상업에 종사하거나 상업적 농경에 힘쓰는 등 경제의식의 실질화와 이윤추구의 합리화경향도 나타났다.
여덟째, 봉건 조선사회의 성리학적 가정윤리가 급격히 변질되었다. 이것은 화폐경제가 가족경제에 침윤됨에 따라 가족구성원 각자는 이기적 타산에 보다 민감해지는 반면 공동체의식은 약화됨으로써 성리학적 가정윤리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의 와해가 촉진되었다.
아홉째, 문벌이나 정치권력 지향적이었던 전통적 사회위신척도(社會威信尺度)가 재부(財富) 중심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촉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사회위신척도의 급격한 변질과정에서 선비가 글공부를 중단하고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장삿길로 나서고, 돈이면 양반의 신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화폐경제의 발달로 촉진된 전통적 사회위신척도의 변질상을 통하여 조선사회의 봉건적 신분질서 해체현상의 일면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조선 후기, 특히 1670년대 말부터 점점 확대보급된 화폐제도의 발전은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해체 내지 사회의 근대지향을 촉진한 역사적 요인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 말기(1860년대∼20세기 초엽)는 근대화폐제도의 수용기라 할 수 있다. 조선 말기의 화폐발달은 대체로 악화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의 혼란이 시작되는 대원군(大院君) 집권기로부터 시작된다. 대원군은 폐쇄적인 중앙집권적 봉건조선왕조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1860년대 초에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하에서 극도로 문란해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재정비, 강화하기 위해 안으로 서정개혁(庶政改革)에 과감하였고 밖으로는 외침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기 위하여 쇄국정책 내지 군비증강에 힘썼다.
대원군은 조선왕조가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적 재원확보책으로서 실질가치가 종래의 1문전(文錢) 동전의 5, 6배에 불과한 것에 액면가치만 100배로 고액화한 악화 당백전을 주조, 유통시키는 파격적 조처를 취했다.
악화 당백전을 6개월 동안에 1,600만 냥을 남발하여 종래의 1문전 상평통보와 병용함으로써 1670년대 말 이래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대시행된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 즉 동전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일법화유통체계는 심각한 혼란에 이르렀다.
당백전의 남발은 직접적으로는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가 문란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가가 폭등하여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모순과 폐단이 심각해지자 당백전을 사용한 지 2년여 만에 통용을 금지했다. 당백전의 통용을 금지시킴으로써 초래된 거액의 재정적 손실을 보전할 목적으로 역시 악화인 중국동전 300만∼400만 냥을 수입해서 사용하였다.
이렇게 악화남발로 야기된 명목화폐제도의 혼란현상은 봉건국가 말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조선왕조는 당백전 등 악화를 남발함으로써 심각해진 화폐제도의 문란 내지 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을 수습, 재정비하지 못한 채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및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관계(通商關係)를 갖게 되었다.
근대화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와의 통상거래과정에서 체재와 품질이 통일되지 못하고 운반이 불편하며 가치변동이 격심한 국내의 화폐, 즉 전근대적 명목화폐의 모순은 보다 심각해졌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전통적 화폐(상평통보)를 계속 주조, 유통시키는 한편 체재와 품질이 통일되고 운반이 편리하며 가치가 안정된 근대 금 · 은본위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여 선진 여러 나라와 통상거래에서 초래되는 장애와 거액의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근대 화폐제도의 수용을 위한 정부의 화폐정책은 개항을 전후하여 민족주의 지향의식과 근대화 지향의식을 기저의식으로 하여 적극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근대 금 · 은본위화폐제도 수용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1882년(고종 19)에 금화 · 은화의 통용을 결정하고, 은표(銀標)를 주조, 유통시켰다. 이 은표는 그 주조기술이나 체재 및 품질 등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근대 금 · 은본위화폐제도하의 은화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전근대적 칭량은화가 근대화폐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은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883년에는 격증하는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전근대적 명목화폐, 즉 악화 당오전(當五錢)을 주조, 유통시키는 동시에 근대 금 · 은본위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상설조폐기관으로서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고 독일로부터 근대 조폐기술을 도입, 1888년에는 마침내 역사상 최초로 15종류에 달하는 금 · 은 · 동전의 주조 · 유통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상 근대화폐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시도한 왕조당국의 노력은 한갓 시험단계에 그쳤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91년에 은본위화폐제도의 채용을 골자로 하는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를 공포하고 인천전환국(仁川典圜局)에서 은전(銀錢)을 비롯한 백동전(白銅錢) · 적동전(赤銅錢) 및 황동전(黃銅錢) 등 5종의 근대화폐를 주조하였다.
조선왕조는 문호개방 이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화정책(開化政策)의 일환으로서 화폐개혁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나, 그것은 소요재정의 조달난, 정파간의 의견대립, 화폐주조업의 관리방법과 조폐기술의 미숙성 및 청 · 일의 간섭 등이 직접적 · 간접적 원인이 되어 그때마다 한갓 시험단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의 추진과정에서 일본의 화폐제도를 본떠서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을 공포, 시행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근대 은본위화폐제도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전문(全文) 7개조로 된 <신식화폐발행장정>의 공포, 시행으로 <신식화폐조례>에 있어서의 그것처럼 5냥은화(五兩銀貨)만을 본위화(本位貨)로 하고, 나머지 백동전 · 적동전 및 황동전 등 4종의 화폐는 보조화폐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장정(章程) 제7조에는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까지는 국내화폐와 동질(同質) · 동량(同量) · 동가(同價)의 외국화폐를 병용하는 것을 허가한다고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장정이 시행된 경위나 내용 내지 성격으로 볼 때 그것이 갖는 한계도 적지 않았다.
즉, 이 장정은 침략적인 일본의 강한 영향력 밑에서 추진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의 화폐제도를 본떠서 제정, 공포되었으며, 또한 그것은 일본화폐의 국내통용을 합법화시켜놓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장정의 실시는 정부의 화폐에 대한 자주독립성이 침해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장정이 공포, 시행된 뒤 본위은화는 극히 소량만이 주조되고, 보조화인 백동화가 합법 또는 불법적으로 남발됨으로써 화폐가치는 떨어지는 반면 물가가 폭등하는 등 이른바 백동화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더욱이 국내정세가 혼란하고 우리 나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간에 세력균형의 변화가 일어나자, 이와 같은 사실들이 직 · 간접적 원인이 되어 1901년에 이르러서는 <신식화폐발행장정>의 실시는 마침내 중지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중지에 대응해서 1901년 2월에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광무5년 화폐조례’를 공포하게 되었다. 전문 11개조로 되어 있는 이 <화폐조례>는 제1조에서 화폐의 제조발행권은 일체 정부에 속한다는 점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20환금화(二拾圜金貨)를 비롯하여 은전 · 백동전 · 적동전 등 7종의 화폐를 주조, 유통시킬 것을 제3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이 밖에도 법화규정(法貨規定), 구화폐와의 교환규칙, 사조화폐(私造貨幣)의 통용금지규정, 구화폐병용규칙 등의 내용이 규정되었다. 이 <화폐조례>는 1898년에 의정부회의에서 가결, 황제의 재가를 받았던 것을 1901년에 탁지부대신이 제의하여 확정, 공포했다.
은본위제를 금본위제로 바꾸는 이 ‘광무5년 화폐조례’는 아관파천 이후 국내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친로정권 내지 친로배일정권(親露排日政權)의 주도하에 구상되었다.
요컨대, 한말의 친로정권은 금본위화폐제도의 실시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한편, 화폐권(貨幣權)의 침탈에 집착해온 일본의 강한 영향력 밑에서 채택된 <신식화폐발행장정>의 중지에 대응하여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광무5년 화폐조례>를 제정, 공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2년, 일제는 <화폐조례>의 공포에 대한 반발로 국가의 화폐권을 크게 침해하는 불법적 행위로서 일본은행권(日本銀行券)의 국내통용을 시도하였다.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은 주권국가인 한국정부로부터 어떠한 사전허가나 양해도 없이 다만 자국정부의 불법적인 특허만 얻어 <주식회사다이이치은행권규칙(株式會社第一銀行券規則)>을 제정, 1902년 5월부터 한국 내에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목포 · 인천 및 서울 등지로 점점 은행권 발행지역이 확대되자, 정부당국과 상인을 비롯한 일반대중의 은행권통용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우리 나라의 화폐권침탈을 위한 일제의 야욕이 노골적이고 침략적이었던만큼 그것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 역시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저항은 군함까지 동원하는 일제의 무력시위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저항의 실패로 한국정부의 화폐권 내지 자주독립권에 대한 일제의 침해행위는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행권의 통용반대운동은 국가의 화폐권 내지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저항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1904년 2월에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고, 전쟁이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그 해 8월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제1차한일협약)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정부는 일본인 메가타(目賀田種太郎)를 재정고문으로 고용, 국가재정은 물론 화폐와 금융에 관한 모든 업무를 그에게 위임하였다. 그가 고용될 무렵 한국정부의 재정은 극도로 문란하고 궁핍에 허덕이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재정개혁을 건의, 백동화의 남발 등 극도로 문란한 화폐유통질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메가타의 건의에 따라, 악화 백동화 남발의 본산으로 알려진 상설 조폐기관인 전환국을 1904년 11월에 폐지하고, 조폐사무(造幣事務)를 일본 대판조폐국(大阪造幣局)에 위탁하였다.
그리고 1905년 1월에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광무9년 화폐조례>를 공포했다. 당시 공포된 <화폐조례>는 이미 1901년에 법률상으로 채택하였으면서도 실시되지 못하고 있던 <광무5년 화폐조례>의 내용을 약간 수정, 보완한 것이었다.
<광무9년 화폐조례>의 내용을 보면, “제1조 본국 화폐의 가격은 금을 가지고 기초로 삼아 본위화의 근거를 공고히 한다. 제2조 위 조항에 의하여 광무 5년 칙령(勅令) 제4호로 정한 화폐조례는 올해(1905) 6월 1일부터 실시한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역사상 최초로 근대화폐제도로서의 금본위제가 실시되었고, 이와 같은 금본위제는 일본 다이이치은행에서 담당, 수행한 화폐정리작업을 통해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금본위제 채택이 국가의 자주독립권이 거의 상실된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의 한계를 부인할 수 없다.
1901년에 금본위제도의 채택을 내용으로 하는 <광무5년 화폐조례>가 공포되어 법률상으로는 금본위제도가 도입되었으나, 러일전쟁 등으로 1904년 말까지 이 제도는 실시되지 못했고 계속 은본위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은본위제도도 실제로는 명목뿐이었다. 은본위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고종 28년(1891)의 신식화폐조례’가 제정된 다음해(1892)에 5냥은화 1만9923환(圜)이 주조되었을 뿐이고 그 이후 1904년까지 주조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명실상부한 금본위제도는 1905년 1월 일련의 <광무9년 화폐조례>, 즉 <화폐조례 실시에 관한 건>이 발표, 실행됨으로써 확립되었다. 공포된 <화폐조례>와 그 뒤 개정안에 따라 1905년부터는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발권은행이 되어 새로운 화폐 주조에 착수하였다.
금화폐의 순금양목(純金量目)은 2분(分)을 가격의 단위로 정하고 이를 환(圜)이라 부르기로 하였으며, 50전(錢)을 반환(半圜), 100전을 1환이라고 칭하기로 하였다. 화폐의 종류는 모두 9종으로 하여 20환 · 10환 및 5환의 금화폐, 반환 · 20전 및 10전의 은화폐, 5전의 백동화폐, 1전 및 반전의 청동화폐가 있었다.
한편, 제1차 한일협약을 계기로 성립된 일본화폐의 국내 무한정 통용규정을 1904년 정식으로 공인하고, 일본 다이이치은행과 ‘화폐정리사무집행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여 이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을 법화로서 통용하게 하였다.
또한 같은 해 7월부터는 경성 · 평양 · 인천 · 진남포에 화폐교환소를 설치하여 그 동안 화폐제도 문란의 원인이었던 백동화를 회수, 정리하도록 하였다. 백동화의 회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1908년 11월에 교환업무는 마감하게 되었다.
엽전은 일종의 상품화폐로서 실질가치와 명목가치의 차이가 별로 없어서 그 폐해가 백동화처럼 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이 애호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조급한 정리를 피하고 국고의 출납을 통해 서서히 회수하도록 하였으므로 상당기간 동안 준보조화폐로서 계속 유통되었다. 금화는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145만 원을 주조하였던 것이나 거의 전부가 정화준비로서 보장되었다.
이상의 문란한 화폐의 정리, 금본위제도의 수립 등은 우리 나라의 화폐 · 금융 및 재정에 관련한 모든 정책을 일본의 의도에 따라 마음대로 처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지 우리 나라의 자주적 화폐제도의 발전정책은 아니었다. 즉, 우리 나라 전통이나 관습 등 여러 여건을 무시하고 일본의 침략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1909년 11월 우리 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이 설립되어 한국은행이 은행권을 독점적으로 발행하도록 되었지만, 한국은행이 업무를 보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직 한국은행권이 마련되지 못하여 발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국은행권이 발행되기까지는 종전의 다이이치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서 발행하는 것으로 공시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은행이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을 때의 은행권은 다이이치은행권이었으며, 한국은행권의 제조는 일본의 인쇄국에 발주하고 있었다. 다이이치은행권을 대신하여 한국은행권이 처음으로 발행된 것은 1910년 12월 21일이었다.
이날 먼저 1원권이 발행되고 이듬해 6월에 이르러 비로소 5원권과 10원권이 발행되었다. 이들 한국은행권의 양식은 다이이치은행권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며, 다만 명칭 · 행장 · 근거 등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한편, 러일전쟁시 군용통화로서 발행하였던 50전 · 20전 · 10전짜리 소액은행권은 유통질서를 혼란시켜서 1911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고시 제89호에 따라 1원 미만의 은행권의 발행을 금지하고 기존 발행된 군용통화는 1912년 3월 31일 한도로 하여 통용이 금지되었다.
1911년 2월에는 <조선은행법>을 공포하고 그 해 8월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여 구한국은행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승계시켰다. 따라서, 한국은행권은 조선은행권으로 인정되었고, 조선은행이 발족한 얼마 후까지도 한국은행권이 발행되었다. 마침내 조선은행은 1914년 9월에 이르러 100원권을 발행하게 되었고, 이듬해 1915년에 1원권 · 5원권 · 10원권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 뒤 조선은행권은 계속 발행되어 만주지방과 중일전쟁 때에는 중국본토에까지 유통되었으며 그 발행고는 구한국은행이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인계받은 발행고 1180여만 원으로부터 8 · 15광복 때에는 49억 원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은행의 발권제도를 살펴보면, 조선은행은 은행권발행권을 독점하였으며, 발권제도는 굴신제한법(屈伸制限法)을 택하여 정화준비발행과 보증준비발행을 병행하였다. 즉, 정화준비발행은 발행고와 동액으로 하고 그 중 은지금은 준비액의 4분의 1을 초과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보증준비발행 한도액은 3000만 원으로 정해졌다가 그 뒤 1918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함에 따라 5000만 원으로,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라 1억 원으로 증대되었다가, 1940년경부터는 일본의 국내경제사정이 급박하게 되고 또 국제무역상 금의 필요성이 감소되자 1941년 ‘조선은행권의 임시특례’가 실시되어 최고발행액제한제도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이 특별조처로 말미암아 정화준비발행과 보증준비발행의 구분이 없어지고, 그 대신 은행권의 발행한도는 정부의 재정금융정책과 아울러 통화팽창도를 감안하여 책정되었다.
1931년에 일본의 금태환이 정지되고 정화준비에 포함된 일본은행권이 불태환으로 되었고 나머지 정화준비마저 완전히 국채로 대체됨으로써 불환지폐본위제인 관리통화제가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그 해 11월 군정법령 제21호에 의해 그 전의 <조선은행법>은 계속해서 존속하였고, 그 뒤 미군정법령 제57호에 따라 일본은행권 및 대만은행권의 회수와 더불어 점령군 보조군표도 회수되었으므로 실제로는 조선은행권만이 유일한 법화로서 계속 유통되게 되었다.
한편, 통화발행고는 광복 직후의 일본인에 의한 종전대책비라는 명목의 대량증발과 미군정비의 거액지출 및 전후경제질서의 혼란 등으로 광복 당시의 49억 원에서 1949년 말에는 751억 원으로 급격히 늘었다.
이와 같이 광복 후 급격한 통화팽창에 따라 조선은행권의 중심권종도 저액권으로부터 고액권인 100원 권으로의 이행이 불가피하게 되어 1948년 이후에는 100원 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49년에는 최고발행한도가 책정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새로운 양식의 5원권과 10원권을 발행하고 동시에 11월에는 5전 · 10전 · 50전권 등의 소액권도 발행하여 화폐제도의 정비를 꾀하다가 1950년 6월에는 한국은행이 발족하게 되었다.
1950년 <한국은행법>이 제정되기 이전의 조선은행권은 1942년까지 보증준비신축제한제도에 의하여 발행되었고, 1942년 이후는 최고발행액제한제도에 의하여 발행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바로 중앙은행법이 제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1950년 <한국은행법>이 제정될 때까지 법제면에서는 최고발행액제한제도가 적용되었으나 실제 운영면에서는 유명무실화하였다.
1950년에 제정된 <한국은행법>에는 은행권발행에 있어 금 또는 외화준비를 전혀 요구하지 않고 은행권발행액에 대한 최고한도도 설정하지 않아 완전한 관리통화제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1950년 8월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한국은행명이 들어간 1000원권과 100원권을 발행하였다. 1950년 통화조처 이후 1952년 10월 한국조폐공사를 신설하여 1000원권과 500원권을 발행하였고, 그 뒤부터 한국은행권의 제조는 전적으로 한국조폐공사에서 맡게 되었다.
또한, 한국은행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주화를 발행할 수 있는 주화발행독점권도 가지고 있어서 1959년 정부의 승인을 얻어 100환 니켈화, 50환 백동화, 10환 청동화 등 3종의 주화를 발행, 통용시켰다.
1961년 5 · 16군사정변 후 군사정부는 1962년 6월 10일 제3차 통화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 조처에 의하여 10분의 1로 호칭절하하는 동시에 화폐단위를 ‘원’으로 변경하였다. 이리하여 새로 원화는 1원 · 5원 · 100원 · 500원권의 6종으로 변경되었다.
그 뒤 신규발행 또는 손상된 은행권 등의 은행권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62년 9월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 제조된 신 10원권과 12월에는 신 100원권이 발행되었고, 또한 소액거래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신규로 10전권과 50전권이 발행되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종래 국내에서 제조된 은행권은 그 제조방법이 쉽고 질이 낮아서 위폐가 빈발하였으므로 1965년 이후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 최신식 요판인쇄에 의하여 제조되었고, 잠정적으로 통용되던 구 50환 및 구 10환을 대체할 목적으로 1원 및 5원화와 새로이 10원화가 순수한 국내기술에 의해 동과 아연으로 주조되었다.
이어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에 따른 화폐수요의 격증과 거래량의 폭주에 맞추어 5000원권과 1만원권을 발행하게 되었다.
광복 후 한국은행은 한국은행권과 주화의 독점적 발행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발행된 통화가치의 안정과 화폐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세 차례의 통화조처를 실시하였다.
제1차 통화조처는 1950년 9월에 북한의 적성통화를 배제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6 · 25전쟁중 북한은 남침지역에서 조선은행 100원권의 남발 등을 자행하여 경제를 교란하였기에 대통령긴급명령 제10호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에 따라 5회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함으로써 1953년 1월 16일까지 취해진 조처이다.
제2차 통화조처는 1953년 휴전협정체결 직전 2월에 과잉구매력의 제거와 재정 · 금융 및 산업활동을 안정화하기 위해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에 의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그 당시 우리 경제는 6 · 25전쟁으로 모든 생산활동이 거의 정지된 데다가 막대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통화의 증발을 불가피하게 하여 인플레이션 압력은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원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모든 거래 및 원화표시 금전채무는 100:1의 비율로 절하시켜 그 단위를 새로운 ‘환’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제3차 통화조처는 5 · 16군사정변 다음해인 1962년 6월에 단행하였는데, 그 목적은 부정축재를 비롯해 구정권의 부패에 편승, 음성적으로 은닉, 축적되었던 퇴장자금을 산업자금화하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투자자원을 동원하는 한편, 1961년 이래의 통화증발과 물가경향에 비추어 예견되던 악성인플레이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긴급통화조처의 내용은 구환화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호칭가치를 10분의 1로 절하하는 동시에 모든 자연인 · 법인 및 임의단체의 구은행권과 지급지시를 금융기관에 예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환화표시금액을 원표시금액으로 변경, ‘원’화의 신권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화폐의 개념은 학자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기에 그 범주로 넣을 수 있는 것도 변화해왔다. 오늘날 화폐란 단순한 주화 · 지폐 등의 현금뿐만 아니라 현금과 비슷한 기능 또는 유통성의 정도에 따라 유사화폐(또는 근사화폐 · 준화폐)라 하여 광의의 화폐범주에 포함시킨다. 구체적으로 수표 · 예금 · 어음 · 유가증권 등을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이러한 것들이 유통성을 가지고 현금과 같은 기능을 하였는가는 금융기관의 성립 · 정비과정과 관련을 갖게 되는데, 먼저 1905년 9월에 <약속어음조례>와 <어음조합조례>가 제정, 공포됨으로써 근대적 출발이 시작되었다. 이 규정은 어음의 형식의무를 명백히 규정함으로써 그 남발에 따른 폐단을 막고 조합조직에 의한 보증의 길을 열어 신용화폐의 원활한 유통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06년 1월부터 업무를 개시한 한성어음조합에 이어 평양 · 대구 등 각 지방에서 어음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조합이 보증하는 어음은 은행에서 우대금리로 할인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함으로써 어음의 유통을 격려하였다.
그 뒤 1906년 농공은행의 설립, 1907년 <지방금융조합규칙>의 제정, 1911년 조선은행, 1912년 <은행령>의 공포 등으로 1910년대부터는 일반은행의 설립이 본격화되어 어음 · 수표 · 예금 등은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화폐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유통적 측면에서 규제대상으로의 화폐를 규정할 때는 그 범주가 점차 확대되었는데, 1957년부터 1969년 상반기까지는 현금과 예금통화(당좌예금 · 보통예금 · 별단예금)를, 1969년 하반기에는 저축성예금까지를, 그리고 1970년 이후에는 국내여신을 각각 통화의 규제대상으로 규정했기에 1970년 이후에는 어음 · 예금증서도 화폐의 범주에 넣을 수 있고, 2000년대는 금융 · 증권시장의 발달로 주식 · 채권 등도 유사화폐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