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에 곡물이 흔하면 값을 올려 사들이고, 흉년에 곡물이 귀하면 값을 내려 팔아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위(魏)·한(漢)에서 설치, 운영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12년(993) 양경(兩京 : 開京·西京)과 12목(牧 : 楊·廣·黃·海·忠·淸·公·全·羅·昇·尙·晉의 12州)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 때 미(米) 6만 4,000석(石)을 기금으로 마련하였다. 그 중 5,000석은 개경의 경시서(京市署)에 쌓아두고, 대부시(大府寺)와 사헌대(司憲臺)가 감독하였다. 나머지 5만 9,000석은 서경과 주·군(州郡)의 창고 15곳에 분속시켰다.
그리고 서경은 분사(分司) 사헌대가, 주군은 계수관(界首官)의 관원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후 언제부터인가는 유명무실해져 1371년(공민왕 20) 다시 설치하라는 조처가 취해졌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1409년(태종 9) 전라도관찰사 윤향(尹向)이, 1436년(세종 18) 충청도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각각 그 설치를 건의한 바 있다. 그러나 재정의 부족과 시행과정상의 폐단이 거론되어 채택되지 않았다.
1458년(세조 4) 하삼도도순문진휼사(下三道都巡問賑恤使) 한명회(韓明澮)의 건의에 따라 각 도에서 관찰사의 주관으로 한두 읍(邑)에 시험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비로소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상평창의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분량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활발하게 시행되지 못하였다. 1525년(중종 20)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해 많은 자곡(資穀)을 공급하였다. 이에 상평창도 진휼청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관원도 두 관청의 임무를 겸무함으로써 상평창의 기능은 일시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