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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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에 설치되었던 상설 조폐기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전환국은 1883년(고종 20)에 설치되었던 상설 조폐기관이다. 개항 이후 국가의 재정수요가 급증해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한 민씨 정권은 수익성이 높은 화폐주조사업을 직접 관리·운영하기 위해 전환국을 설치했다. 근대 조폐설비를 수입하여 시험단계를 거친 뒤 1892년부터 화폐를 주조했으나 공식적으로 유통된 것은 1894년부터였다. 하지만 조악한 백동화의 주조 남발은 많은 폐해를 낳았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폐지 건의안을 수용해 폐지되었다. 15종에 달하는 화폐 주조·발행은 근대 화폐제도 도입을 위한 첫 시도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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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3년(고종 20)에 설치되었던 상설 조폐기관.
역사적 배경

흥선대원군에 이어 집권한 민씨 정권은 대원군 집권기부터 사용된 300만∼400만 냥에 달하는 중국 동전[淸錢]을 유통상의 폐해를 이유로 통용을 금지시켜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이에 겹쳐 개항 이후 국가의 제반 재정 수요는 급증해 당시 조선은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1883년 악화 당오전(當五錢)을 주조 · 유통하기로 결정해 서울 여러 곳과 각 지방에서 다량으로 주조, 유통시켰다.

그러나 이 임시 주전소에서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충분한 액수의 화폐를 주조해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다량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한 상설조폐기관의 설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직접 동기 이외에 간접 동기로서 조선 후기에 화폐주조사업은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조선정부는 일찍부터 ‘화권재상(貨權在上 : 화폐주조권은 중앙에 둔다)’을 내세워 화폐 주조를 중앙에서 관리 ·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씨일파가 집권한 뒤에는 급증하는 국가의 재정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중앙관서 · 지방관청 · 군영 등에서 화폐를 악주, 남발했다. 화폐주조권의 이러한 다원화를 일원화하여 화폐주조사업을 합리적 · 능률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또한, 조선의 전통 화폐제도는 이미 문란해져서 화폐가치가 불안정하고 운반이 불편하였다. 게다가 통화량이 부족해지면서 선진제국과의 통상거래에 적지 않은 애로와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근대 화폐를 주조할 상설조폐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환국을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용
  1. 설치

처음에는 서울에 설치되었으나, 1892년 인천으로, 1900년에는 용산으로 옮겨졌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겨진 표면상의 이유는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울에 비해 일본인의 영향력이 큰 인천에 전환국을 설치해 선진기술과 자본을 이용, 좀 더 쉽게 조선의 화폐권을 침해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작용했던 것 같다.

인천에서 다시 용산으로 옮기게 된 데에는 경인선 개통을 앞두고 운수 교통상의 불편이 해소되리라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자주독립 내지 자강사상(自强思想)이 팽배하던 당시, 일본과 민감하게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화폐권을 침해하려는 일본 측에 대한 조선 측의 반격적 조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환국의 관제는 초기의 것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1894년 갑오경장 때 독립기관이었던 것이 탁지부(度支部) 10개국 중 1개국으로 이속되고, 그 직제도 대폭 감축되었다.

1896년에는 탁지부 소속 2등국으로 하여 직제를 확장하고, 각 직급의 업무 분담을 명확히 규정하는 등 발전적으로 개혁했다. 1900년 다시 관제 개혁을 단행, 탁지부 소속에서 독립기관이 되었으며, 총책임자도 국장에서 관리(管理)로 바뀌었다.

1901년 전환국 관제를 개혁해 탁지부의 1개국으로 환속시켰으며, 1902년에는 독립기관으로 분립시켰다.

  1. 활동 내용

전환국은 근대 화폐를 주조 · 발행하기 위해 1880년대에 독일로부터 근대 조폐기기시설을 구입하였다. 독일인 또는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 · 고용해 근대 화폐의 주조 · 발행을 시도했으나 시험적 단계에 그쳤다.

그러나 경성전환국에서 15종에 달하는 근대 화폐를 주조, 발행하려고 한 것은 한국화폐 사상 근대 화폐제도 도입을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1892년부터는 「신식화폐조례」의 시행에 따라 인천전환국에서 5냥 · 1냥 은화,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및 1푼 황동화 등 5종의 근대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발행, 유통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뒤이어 1894년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제제도 개혁의 일환으로서 「신식화폐발행장정」이 공포 · 시행되었다. 이때부터 인천전환국에서 이미 주조되었던 근대 화폐를 발행 · 유통하는 동시에 계속 근대 화폐를 주조 · 발행하였다.

1900년 종래의 화폐주조사업에 그쳤던 관장업무를 태환금권제조(兌換金券製造) · 구화폐주궤(舊貨幣鑄潰) · 금은정제분석(金銀精製分析) · 제광물을 시험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1901년에는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화폐조례를 공포했다.

  1. 폐지

1904년 폐지될 때까지 주조 · 발행된 화폐량은 1896만 685환의 거액이었다. 특히 백동화는 악주 남발되어 전체 화폐주조발행고의 88%인 1674만 3522환이었다.

뿐만 아니라 1904년경에는 거의 1,000만환 상당의 위조 백동화가 유통되고 있어서 백동화의 악주 남발로 인한 화폐제도 내지 통화질서의 문란은 심각했다.

이로 인해 다량의 백동화가 관주(官鑄) · 위조 또는 일본으로 밀수입되어 국내의 통화량이 급증하자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급등해 국가 재정이 병들고 국제무역이 저해되며 각 계층 모두의 생활이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한국과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일본 측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백동화의 모순과 폐단을 해결하자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이해를 함께 하고 있던 일본이 개입해 백동화의 위조나 밀수입의 금지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백동화의 악주 남발은 당시의 어려운 국가재정 형편과 일본 · 러시아 양대 세력의 민감한 대립 갈등으로 쉽게 금지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정정리작업의 일환으로 화폐제도 개혁에 적극 개입했다.

당시 재정고문이었던 메가다(目賀田種太郎)는 백동화의 남발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극도로 문란해진 화폐제도를 정리하기 위해 백동화를 남발하는 전환국의 폐지를 정부에 건의했다.

국가의 주권을 거의 상실했던 조선정부는 전환국 폐지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화폐권 수호를 위한 저항은 종식되고, 한국 화폐에 대한 지배권은 일본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2∼6(국사편찬위원회, 1968∼1972)
「이조말기독일(李朝末期獨逸)로부터의 근대조폐기술도입(近代造幣技術導入)에 대해」(원유한,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전환국고(典圜局攷)」(원유한, 『역사학보(歷史學報)』37, 1968)
「당오전고(當五錢攷)」(원유한, 『역사학보(歷史學報)』35·3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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