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 아버지는 판서 박준원(朴準源)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누이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이다.
1790년(정조 14) 진사시에 합격해,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을 거쳐 순안현령(順安縣令)·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가 수렴청정을 하자 총애를 입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기용되고, 홍문관의 응교(應敎)·부제학(副提學),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규장각에서는 직각(直閣)으로부터 직제학(直提學)까지, 그리고 참찬을 거쳐 판서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804년 잠깐 여주목사를 지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매일 사방에 격문이 나돌자, 당시 훈련도감에 있으면서 군심(軍心)을 진정시키기에 힘썼다.
1812년 호조판서가 되어 군국기무에서 공부(貢賦)까지 실권을 쥐었다. 이 때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으로부터 임금의 인척으로 권세와 복을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 탐내고 사적인 감정으로 살인하는 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내직에 들어와 몇 년 후 훈련도감을 맡았다. 1814년에는 왕의 병에 약을 조제한 공로로 안장을 갖춘 말과 토지·노비가 하사되었다. 박종경이 죽자 왕은 친히 제문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가통을 세우기 위해서 5대 이하의 유고를 모두 모아 『반남박씨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하고, 비석이 없는 선대의 묘소에 모두 비석을 세웠다. 글씨로는 「박준원신도비(朴準源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