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신(汝臣).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1787년(정조 11) 누이가 수빈(綏嬪: 순조의 생모)이 되자 음보(蔭補)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등용되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의빈부(儀賓府)와 충훈부(忠勳府)의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7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정조의 아들이 태어나자 임금의 명에 따라 궁중에서 보육의 책임을 맡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할 때, 왕의 몸을 보호하는 가까운 친척이 측근에 있어야 한다고 해 임금의 외숙으로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고, 임금이 천연두를 앓을 때 입직한 공로로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03년 형조참판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1806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도시제조(司䆃寺提調)가 되었다. 이 때 대신들의 천거로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음관(蔭官)이 단천(單薦)으로 호조판서가 된 것은 유례가 없다.”고 세 차례나 상소해 사양하였다.
비변사당상으로 바꿔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정조로부터 “비록 음관으로 벼슬에 올랐지만 풍도(風度: 풍채와 태도)는 문신과 같으니 후일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여러 번 과거에 떨어졌으나 태연하였다.
초년에 빈한하게 살았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올라 녹봉이 많아지자 즐겨 남을 도와주었으며,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