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오전 ()

근대사
제도
1883년(고종 20) 2월에 주조되어 1894년 7월까지 유통되었던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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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당오전은 1883년(고종 20) 2월에 주조되어 1894년 7월까지 유통되었던 화폐이다. 조선 정부에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통화 개혁의 일환으로 주조하였다.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여 주조를 전담하게 하였는데 1888년 민간인에게 도급주전(都給鑄錢)을 허가하였다. 도급주전에 대한 세금을 주전 일수(鑄錢日數)로 부과하여 품질이 열악해지고 화폐 가치가 폭락하였다. 화폐 가치의 폭락과 국내 화폐의 비가절하(比價切下)로 국제 무역에서 손실도 커지면서 사회경제적 모순을 확대, 심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정의
1883년(고종 20) 2월에 주조되어 1894년 7월까지 유통되었던 화폐.
개설

명목 가치는 1문전(文錢) 상평통보 5매의 그것과 같았으나, 실질 가치는 상평통보의 약 2배에 지나지 않았다.

내용 및 변천사항

조선 정부는 세도정치 이래의 만성적인 재정난과 1876년 개항 이후 해외사절파견비, 부산 · 원산 · 인천의 개항비, 신식 군대 창설비 등 새로운 재정 지출로 극심한 재정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1882년 일시적으로 대동삼전(大東三錢) 등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인천 개항 이후 격증하는 경비 지출을 타개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통화 개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2월 정부에서는 당오전 주조를 결정하였다. 민태호(閔台鎬)가 책임을 맡았으며, 경희궁, 창덕궁 뒤편, 만리창(萬里倉) 등에서 주조하였다. 이어서  강화도 · 의주 등지에서도 주조하였으나 이들만으로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다액의 화폐를 계속 발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민태호가 주전 사업 상설 기구를 설치할 것을 건의, 그해 7월 전환국(典圜局)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당오전은 전환국에서만 주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환국에서는 주전 원료 공급의 편의상 지방에 주전 사업을 분설하지 않을 수 없어  창원 · 마산에 전환국주전소를 분설하였다.

그러나 1888년 전환국에서만의 당오전주조원칙이 무너지고 호조와 춘천부(春川府) 감독 하에 주전이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일반 민간인에게 도급주전(都給鑄錢)을 허가해 주기에 이르렀다. 도급주전의 경우, 정부는 소정의 세금만을 징수할 뿐 일체의 비용은 도급업자가 전담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세금 부과는 주전 액수가 아니라 주전 일수(鑄錢日數)가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업자들은 보다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당오전을 남주(濫鑄)하였다. 또, 도급주전은 당오전의 품질의 열악화를 가져왔다.

1890년에는 원료 공급 편의를 이유로 전환국주전소를 평양에까지 설치하였다. 이러한 악화 당오전의 주조 사업은 1894년 7월 민씨정권의 몰락, 개화파 정권의 성립과 함께 중단되었다. 당오전은 비록 명목 가치가 상평통보의 5배로 결정되었으나, 화폐의 가치를 명목 가치보다 실질 가치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가치관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명목 가대로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당오전은  경기도 · 황해도 · 충청도 등 정부의 행정력이 비교적 쉽게 미칠 수 있는 지역에서만 통용되었고, 통용 지역일지라도 가치는 1문전 상평통보와 거의 같은 유통 가치로서 통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당오전의 가치가 이처럼 폭락하자, 지방관들은 이를 이용해 조세를 양화(良貨)인 상평통보로 징수해 악화인 당오전으로 바꾸어 내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성행해 국고의 손실은 적지 않았다. 또한, 화폐가치의 폭락에 반비례해 물가는 폭등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 화폐에 대한 국내 화폐의 비가(比價) 절하(切下)로 인해 국제 무역에서 초래되는 손실도 컸다. 결국, 당오전의 주조는 화폐제도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해 물가의 폭등 등 당시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더욱 확대 · 심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조선후기화폐정책(朝鮮後期貨幣政策)에 대한 일고찰(一考察)」(원유한,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6, 1971)
「전환국고(典圜局攷)」(원유한, 『역사학보(歷史學報)』 37, 1968)
「당오전고(當五錢攷)」(원유한, 『역사학보(歷史學報)』 35·3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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