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

근대사
개념
근대 개항기인 1876년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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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일반적인 의미의 개항은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 관계를 갖는 일을 말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의 개항은 근대 개항기인 1876년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일을 말한다. 조선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취하다가 1876년(고종 13) 2월 26일 강화도에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일본과 체결하고 개항하게 되었다.

정의
근대 개항기인 1876년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일.
배경

19세기 중엽, 영국 등 서구 자본주의 열강은 동아시아 시장의 개방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들의 전투와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중국은 1842년 영국과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일본은 1854년 미국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각각 체결하였다.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 열강의 개방 압력은 1866년에서 1871년에 집중되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 미국 군함의 대동강 진입 시도, 남연군묘 도굴사건, 1871년 신미양요가 그것이다.

중국, 일본에 비해 조선에 대한 개방 요구가 늦어졌던 요인으로는 시장 규모가 비교적 작았던 점, 태평양 횡단 항로로부터 거리가 있던 점, 1850년대 중반 이후 영국, 프랑스 등 강국이 유럽 내 전쟁이나 이미 확보한 식민지의 안정에 주력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은 프랑스, 미국과 두 차례 전쟁에도 끝내 개방 요구를 거부했고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외국과의 통상 및 수교를 거부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서구 열강의 요구를 거부했던 조선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시켰던 것은 동일 문명권 내의 인접국 일본이었다.

주요 과정

메이지 유신 후 수립된 일본 신정부는 대마도주를 통해 왕정복고를 알리는 외교문서를 조선에 보냈다. 그런데 문서 형식과 내용이 종전과 달랐다. 특히 대마도주의 직함이 다른 점, ‘조신(朝臣)’, ‘황(皇)’, ‘칙(勅)’ 등 일본 국왕을 황제의 예로 전제한 용어, 종래 일본 측 요구로 무역과 외교에 사용되던 인장을 자의적으로 변경해 쓴 점이 문제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기존 외교를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일본측 외교문서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서계(書啓) 문제였다. 조선 정부 측 서계 접수 거부로 인해 1873년 일본 정부 내에서는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부상하였다. 메이지 정부 내에서 정한파와 내치파의 정치적 갈등은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비화하여 결말을 맺었다.

한편, 조선에서도 집권 세력이 교체되었다. 고종은 1873년 10월 최익현(崔益鉉)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최익현은 동부승지 사직상소에서 대원군 치세 전반을 비판하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였다. 관료들은 최익현 처벌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최익현을 옹호했고, 결과적으로 한 달여 만에 조정 내 대원군 지지 세력이 축출되었다.

한편, 조선 사회 내부에서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박지원(朴趾源) · 박제가(朴齊家) 등의 북학론자들은 청을 야만, 적대시하던 이전의 태도를 벗어나 선진 문화의 수용과 기술 도입을 주장하였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일본이나 미국에 대하여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개국론(開國論)을 주장하였다. 개국론과 관련하여 「북유일기(北游日記)」, 「북유담초(北游談草)」, 「북유속담초(北游續談草)」 등 1873년, 1874년 연행을 통한 강위의 기록이 주목된다.

강위(姜瑋)는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새롭게 인식하였다. 서양인들이 침략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점, 일본도 서양과 함께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조선이 오랫동안 의지했던 중국이 대국적 면모를 상실해 위기 상황에서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점 등을 알게 되면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살아남는 길은 승산 없는 전쟁이 아니라 문호 개방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고종은 연행사행의 보고를 통해 조선을 둘러싼 대외정세 변화를 인식하였다. 특히 중국 황제의 친정은 고종의 집권 의지를 굳히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친정을 단행한 직후 이유원(李裕元)과 박규수(朴珪壽)를 영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1874년 각지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부패 관료의 척결에 주력하였다. 그 가운데 대원군의 심복으로서 종래 조일외교를 담당했던 경상도관찰사와 동래부 대일외교 담당 관리 등이 교체되었고, 왜학훈도(倭學訓導) 안동준(安東晙)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고종 친정 후 대일정책 전환으로 양국 간 평화롭게 국교를 재개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박규수는 일본측의 서계를 일단 접수 후 검토할 것을 주장하여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며 대일정책의 전환을 주도하였다.

동래부에서 조선 측과 일본 이사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의 국교 재개 문제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었다. 양측은 모리야마가 서계를 고쳐 가지고 돌아오면 접수하고 나머지 사항을 추후 의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지고 돌아온 서계는 용어, 본문이 일본어로 된 점, 대마도에 주었던 인장의 반환 등이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일본 측에서 교섭 촉진을 위해 무력시위를 했던 것이 도리어 조선 정부의 의구심을 증대시킨 결과, 정부 내에서 서계 접수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양국 교섭은 실패로 끝났고 일본 측은 군함을 동반한 무력시위를 결정하였다. 미국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개방했던 자국의 경험을 조선에 적용한 것이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조선의 초지진 인근 해역에 접근하여 한강 하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자, 조선군은 이를 침략 행위로 간주하고 초지진 포대에서 경고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운요호는 초지진을 공격하여 파괴한 후, 조선 연안의 영종도에서 민간인을 살상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후일 ' 운요호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 측은 이를 빌미로 초지진을 파괴한 뒤 회항하던 중 영종도에서 다수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관아와 민가를 불태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측 법률자문을 맡았던 부아소나드는 운요호 사건에 대한 보상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방편으로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압박하도록 권고하였다.

1876년 1월 일본 측 특명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부전권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군함 8척과 해병대를 끌고 와 교섭을 요구하였다. 운요호 사건 책임이 조선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신헌(申櫶)윤자승(尹滋承)을 각각 접견대관과 부관으로 임명해 강화도에서 교섭하도록 명했고, 오경석(吳慶錫), 강위 등이 참가하였다.

박규수의 주선으로 파견된 신헌은 병인양요, 신미양요에서 공을 세운 무관(武官)이었고,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토대로 수뢰포 등 서양식 신무기의 제작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신헌을 수행해 교섭에 참여했던 오경석과 강위는 조선 정부 내에서 개항에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가 전권대신의 보고를 접하고 조약 체결 결정을 확정하는 데 불과 사흘이 걸렸다. 접견대관의 보고는 대일수교를 둘러싼 정부의 공론이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개국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었다.

예컨대 「심행잡기(沁行雜記)」에서 강위는 일본이 ‘오랑캐’ 혹은 ‘금수’가 아니라 뛰어난 병기를 제작할 수 있고 정예한 군대를 보유한 ‘이웃 대국’이라는 실상을 전달하고, 반면 조선의 국력이 일본을 적대하거나 왜양연합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므로 개국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중국이 조선을 도울 여력이 없어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대일수교를 주장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즉, 여전히 서계 접수 거부 주장이 대세였던 가운데 박규수, 이최응(李最應), 이유원(李裕元) 등 소수의 개항론자들의 의견을 고종이 수용한 것을 바탕으로 개항을 전격 결정했던 것이다.

의정부는 신헌에게 조약에 대한 전결권을 부여하여 협상을 조속히 매듭짓게 하였다. 신헌은 일본 측이 제시한 조약 문안 일부에 대해 수정안을 제시한 뒤 2월 3일 조약안을 확정하고 2월 6일 조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정부에서 개항을 논의하고 있을 때 재야 유생들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 회복을 반대하는 상소를 잇달아 제출하였다. 대표적으로 최익현은 오늘날 일본은 서양과 같으므로,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양이와의 통교를 의미한다는 논리, 즉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제기하며 개항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조약 체결은 단지 일본과 옛 우호를 회복하는 것(舊好重修)이라고 강조하고 최익현을 유배하여 조약 체결 반대 움직임을 봉쇄하였다.

의의 및 평가

조선의 개항은 한국이 근대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포함외교(砲艦外交)뿐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에서 성장하던 대외개방이 필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작용하였다. 조정 내에서조차 조약 체결 반대 여론이 우세한 가운데 박규수, 신헌, 강위, 오경석 등 소수의 개국론자들이 대일 수교 교섭을 이끌었다.

이들은 안으로는 조약 체결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밖으로는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를 반박하면서도 양국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야 하는 난관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는 일본의 군사적 압력에 직면하여 조선 측에서 조약을 원만히 매듭짓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일수호조규는 조일수호조규부록, 통상장정과 더불어 불평등 조약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경제 구조는 불평등 조약에 바탕을 둔 국가 간 교역을 통해 세계 시장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개항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되었고, 조선 후기 이래 진행된 사회적 변용에 더하여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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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수, 『개항과 조일관계』(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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