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지어 척화(斥和)의 의지를 밝혔다.
그 뒤 1871년(신미년) 4월 3일(음력)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조선군은 초지진 · 덕진진 · 광성보 등에 상륙을 시도하는 미 해군에 대항하여 격렬한 교전을 벌였지만, 마침내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 형제를 비롯한 다수의 사망자를 내고 수(帥)자 기를 빼앗기는 등의 참패를 당하였다.
같은 해 4월 25일 우의정 홍순목으로부터 미 해군과의 교전에 대한 보고를 받은 고종은 “이 오랑캐가 화친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예의를 지켜온 나라가 어찌 개나 양 같은 무리와 서로 화친한단 말인가. 비록 몇 년 동안 서로 대치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통렬히 끊어버리고야 말 것이니, 만약 ‘화친’이라는 글자로 말하는 자가 있거든 매국(賣國)의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의 종로 네거리와 각 도회지에 척화비가 세워졌다.
그 비석에는 큰 글자로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12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작은 글자로 “나의 만년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 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글귀가 함께 새겨져 있다.
1882년 8월 5일 고종은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놓은 척양(斥洋)에 관한 비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려 전국의 척화비를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서울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길 때 발굴되어 경복궁에 보관되었다.
비석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어 부산의 것은 1.8m인 데 비해 함양군 함양읍의 것은 1.2m이다. 그러나 너비는 대체로 40∼45㎝이고, 두께는 대체로 25㎝ 정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첨석(加簷石)을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 형태의 작은 비석이다.
부산진에 건립된 것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 있는 용두산공원 내에 옮겨 세워져 있다. 함양군 함양읍과 안의면 옛 면사무소 안에도 각각 1구씩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