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이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어 한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1차 원정에서 군사정보를 수집한 프랑스 군대는 2차 원정에서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강화부를 점령했다. 이에 조선군은 기병작전으로 강화도를 수복할 계획을 세우고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파한 전투이다.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프랑스공사 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 사실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 · 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 · 최인서(崔仁瑞) · 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 · 군인 · 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잠입하였다. 드디어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 하의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李濂) 지휘 하의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李大興) 지휘 하의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 승첩(鼎足山城勝捷)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해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부를 점거했지만, 정신적 · 육체적으로 피로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유산을 약탈해갔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가령, 미국정부가 1867년 3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미불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정부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 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한 예를 들 수 있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