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는데,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이 지역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으며, 한말 역사의 변천과 함께 많은 흔적을 남겼던 곳 중의 하나였다. 즉, 야소교도(耶蘇敎徒)가 박해를 당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고,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관할 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속하였으며, 서울에 편입되면서 서대문구에 속하였다. 1944년 서대문구에서 분할하여 마포구가 신설될 때 마포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과거 교통 · 경제 · 군사상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였던 양화진 지역은 현재 양화대교가 가설되고 강변도로와 지하철 2호선이 설치되어 있어 여전히 교통상 중요 지역의 하나이다. 특히, 김포공항 · 강화 · 인천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상에 있어 과거와는 다른 형태이나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