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을 중심으로 뻗어 있던 조선 시대 9대 간선로 가운데 하나로 전체 길이는 약 960리였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분포하였던 주요 지선은 29개였으며, 이 도로가 지나는 유곡역(幽谷驛)에서 통영(統營)으로 가는 조선 시대 제5로가 분지(分支)하였다. 행정 구획상 경기도·충청도·경상도를 지나는 영남로는 시대에 따라 통과 지역이 변천하였다.
이들 도로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계를 따라 이루어졌으며,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된 서울∼부산 간 신작로의 모체가 되었고 현 교통망의 근간이 되었다. 주요 도시를 잇는 행정 통신로였으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내륙 지방에 위치하여 전략상 중요한 교통로였던 영남로는 정치·군사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각 지역에서부터 중앙으로 관물(官物)을 수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고, 교통의 요지, 화물의 집산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정기 시장의 분포와 이를 중심으로 상인들의 집결, 취락의 발달 등 사회적·경제적 기능도 지녔던 중요한 교통로였다.
영남로를 따라 분포하였던 통신 제도였던 봉수제(烽燧制)가 임진왜란 당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군사적인 목적의 통신 기능을 맡는 파발제(擺撥制)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을 지나는 파발로(擺撥路)는 남발(南撥)로 지칭되었으며, 역로(驛路)와 과거 봉수로(烽燧路)의 일부를 이용하여 성립되었다. 남발은 보발(步撥)로 급주졸(急走卒)에 의하여 중도 휴식 없이 중간연락식윤속연락방식(中間連絡式輪續連絡方式)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2일 이내에 연락이 가능하였다. 영남로에는 공무 여행자를 위한 역이 약 30리마다 하나씩 분포하였다.
그 밖에 10리마다 장정(長亭 : 쉬어가는 초막), 5리마다 단정(短亭)이 위치하였고 상인 및 일반 여행자를 위한 점(店)·주막(酒幕)·객주(客主)·여각(旅閣) 등의 주막촌이 발달하였다. 남발에도 30리마다 참(站)을 두어 모두 34참이 분포하였다.
새로운 교통 수단의 도입과 간선도로의 변화로 기존의 영남로는 쇠퇴하였으나, 정치적·군사적인 기능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영남로는 현 서울∼부산간 도로와 취락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