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명칭은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 또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서학(西學)·서교(西敎)·천주학(天主學)·천주공교(天主公敎) 등으로 불리어오다가 천주교로 정착하였으며, 가톨릭으로도 불린다.
천주교신앙은 절대자인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한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그리고 천사와 인간을 창조한 진실하고 영원한 전지전능의 존재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인간은 원죄를 쓰고 태어났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여 인간이 범한 죄를 대신 보상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제시되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된다.
즉, 예수는 고난과 죽음으로 인간의 죄의 사함을 받았고, 예수의 부활은 그가 곧 하느님이고 인간의 구세주임을 말한다. 하느님[聖父]은 그리스도[聖子]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고, 성령(聖靈)은 교회 안에 머물러 인간을 거룩하게 한다. 여기서 위(位)는 셋이나 하느님은 단 하나라는 신비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가 세운 교회를 통하여 삼위일체인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성부에게는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성자에게는 인간을 구원하였음을, 성령에게는 인간을 거룩하게 함을 감사드려야 한다. 예수가 교회를 세웠으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하는데, 사제는 거룩한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사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은 제각기 성체봉헌에 참여하여 성사(聖事)를 받음으로써 온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를 바친다.
신자들은 성세성사(聖洗聖事)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견진성사(堅振聖事)로 교회와 더욱 일치하고, 신자의 양식인 성체(聖體: 빵과 포도주,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음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
또한 고백의 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고, 병자의 성사로 그리스도의 위로를 받는다. 이 밖에 혼인성사와 신품성사(神品聖事)를 합쳐 이를 칠성사(七聖事)라고 하는데 인간은 기도와 성사, 거룩한 생활과 사랑, 즉 십계명(十戒命)을 충실히 지켜 실천함으로써 나날이 거룩해져 영원한 삶, 천당에서의 영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이란 보편적이라는 뜻으로, 그것이 전인류를 위하고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며,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말에 대하는 말로, 가톨릭교회의 외부적인 여러 활동(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활동)을 가리켜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 외부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때때로 지침을 제시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교황의 회칙(回勅)이다.
정치에 대해서는 국가를 자연법적인 견지에서 그 존재를 인정하나 국권남용의 전체주의적인 운용을 제한하려 하며, 경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그 어느 것도 긍정하지 않고 제3의 길로서 직분적 사회질서(職分的社會秩序)의 테두리 안에서 경제적 공동선(經濟的共同善)을 실현하기 위한 경제질서를 건설하고자 노력한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사회성을 인정하여, 사회는 인간완성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기는 하나, 결국은 인간 인격의 완성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격주의 측면을 취하며, 문화에 대해서는 각 문화영역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인정하되 그것을 구령(救靈)이라는 최고의 종교목적에 통합시키는 완전한 휴머니즘의 측면에 선다.
천주교 조직의 원리는 교계제도(敎階制度)에 있으며, 그것은 원래 ‘거룩한 질서’의 위계(位階)를 뜻한다. 이 제도에 의하여 하부에 신자층, 즉 평신도가 있고, 상부에 성직자층, 즉 주교와 신부가 있어, 이 두 위계가 합쳐져서 ‘하느님의 백성’, 즉 교회를 형성한다. 교회의 정점에 교황이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는 교황·주교·신부·평신도가 다같이 그 일원에 불과하다.
교회조직은 교구로 나누어지고, 교구는 다시 본당으로 구분되어, 교구는 교구장, 즉 주교에 의해서, 그리고 본당은 주임신부에 의하여 관장된다. 로마교구의 교구장인 로마주교는 동시에 교황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최고의 권위자요 통치자이다. 이는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 수위권(首位權)의 계승자인 사실에 근거한다.
교황은 또한 신앙과 도덕문제에 있어서 그르칠 수 없는 이른바 ‘무류지권(無謬之權)’을 소유하며, 정치적인 면에서 교황은 동시에 바티칸시국의 주권자이다. 교황은 교회의 최고 통치기구로 교황청을 두고, 교황청은 교황의 비서국인 국무성성을 비롯해서 많은 성성(聖省)으로 구성되는데, 각 성성의 장관은 추기경(樞機卿) 중에서 교황이 임명한다.
추기경은 교황이 임명하는 최고의 고문이며, 또한 추기경에 의하여 교황이 선출된다. 교황은 교회의 중대한 문제를 전세계의 주교들의 모임을 통해 결정하는데, 이것이 공의회로 최근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21회에 걸쳐 개최된 바 있다.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각기 지역교회, 즉 교구를 다스리며,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교구 내의 본당을 관리한다.
이러한 성직자의 직책을 직위적 사제직이라고 부르며, 평신도도 그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데, 이를 공동사제직(共同司祭職)이라고 부른다. 천주교에의 정식입교는 영세(領洗)로써 이루어지고, 영세와 동시에 교회의 일원이 된다.
근세 초기 지리상의 발견과 이에 따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과 동시에 서학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일찍이 우리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진출하여 있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Cespedes, G.)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세스페데스는 1598년(선조 31) 말에 조선에 도착하여 약 1년반 동안 부산 부근의 일본진영에 머물면서 일본군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물론 그는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였을 것이지만, 적대관계에 있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민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음을 보고, 일본의 예수회는 조선 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가지고 조선인 개종자를 통하여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내왕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하여 점점 조선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특히 리치(Ricci, M., 중국명 利瑪竇)·샬(Schall, A., 중국명 蕩若望) 등 선교사들의 학덕은 중국황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아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북경을 찾은 조선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하여 새 지식을 얻고자 기회만 있으면 선교사를 만나려 하였고, 선교사들 또한 그들을 기꺼이 대해 그들과 학문과 종교에 관해 필담(筆談)을 나누게 되었다.
이리하여 부경사(赴京使)를 통하여 비로소 서양문물이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1631년(인조 9)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은 신부 로드리게스(Rodriguez, J., 중국명 陸若漢)를 만나 과학기구와 서적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720년(숙종 46)에는 주청사(奏請使) 이이명(李頤命)이 신부 쾨글러(Kogler, F.)와 수아레스(Suarez, J.)를 방문하고 역상(曆象)과 서교(西敎)에 관해 논담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다.
1766년(영조 42)에는 홍대용(洪大容)이 흠천감(欽天監)이던 할레르스타인(Hellerstein, A. 劉松齡), 고가이즐(Gogeisl, A. 鮑友管) 등 신부 2명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하여 필담을 나누었다. 이렇듯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직접 조선에 잠입하여 전도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사신들을 통한 간접적인 시도를 하였다.
특히 중국의 재상인 서광계(徐光啓)와 북경에 볼모로 잡혀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통해서도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모두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만은 17세기 초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하였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實學運動)에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서학이란 서양의 종교와 학문을 내포한 개념인데, 서학은 우선 학문적인 관심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즉,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이미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같이 봄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고, 이익(李瀷)도 『천주실의』 발문에서 유몽인과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판토자(Pantoza, D. de, 중국명 龐迪我)의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는데, 이러한 보유론적인 관점이 이익의 제자들에 이르러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배척하는 측과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 이를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측으로 갈라서게 한다.
즉, 신후담(愼後聃)은 『서학변(西學辨)』에서 일련의 서학서를 논평하는 가운데 천주교의 근본교리인 천주의 창조설과 영혼의 불멸설을 일축한 반면,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때가 1770년경이었다.
그 뒤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 등이 주어사(走魚寺)·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여,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벽은 이승훈이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 가면 선교사를 찾아가 교리를 배워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천주교서적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이승훈은 그의 말대로 북경에 들어가 북당(北堂)의 신부 그라몽(Grammont, J. J. de, 梁棟材)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1784년 봄에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은 돌아오자 곧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친지와 친척들에게 전도하여 그 해 9월부터는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세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고, 중인인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짐으로써 평신도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벽은 교회창설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창설 직후 복음전파를 할 때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데, 그는 우선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이어 중인계급에 전파하여 김범우를 비롯하여 최창현(崔昌顯)·최인길(崔仁吉)·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신생교회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면 무엇보다 학문과 덕망이 높은 저명인사를 입교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權氏) 일가를 찾아가 전교하여 그 결과 철신·일신(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권일신은 개종과 더불어 열렬한 복음전파자가 되어 제자인 호서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호남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천주교를 널리 호서지방과 호남지방에까지 전파시킬 수 있었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 성세성사만이 아니라 고백성사·성체성사 등 다른 성사까지도 집전하기로 하고, 이승훈·유항검·권일신 등 10인을 신부로 임명하여 견진성사를 집전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유항검은 교리서를 읽으면서 견진성사 집전이 불법이고 독성적(瀆聖的) 행위임을 깨닫고, 즉시 이승훈 등 교회지도자들에게 성사를 중지하고 밀사를 북경교회에 파견하여 지시를 받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성사가 중단되고 조선교회의 밀사로 지명된 윤유일(尹有一)은 1789년(정조 13) 말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들어가 이승훈의 편지를 북당 선교사에게 전하고, 회신을 받아서 돌아왔다.
회신에서 선교사들은 성사의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 조속히 선교사를 영입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권고하였는데, 이에 따라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를 영입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실현을 위해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윤유일은 북경에서 주교 구베아(Gouvea, A. de, 중국명 湯士選)를 만나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고, 구베아는 선교사 한 명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그 해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선교사를 조선에 잠입시킬 수 있는 시기와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그러나 약속에 따라 조선 국경까지 온 선교사는 그를 맞아들이기로 한 조선 교우들과 길이 어긋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구베아는 윤유일을 떠나 보낸 뒤 조선에 천주교가 기이한 방법으로 탄생한 사실을 로마 포교성성에 보고하면서, 조선교회를 발전시키려면 관리가 필요하고 북경교구가 이를 담당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포교성성은 1792년 조선교회를 구베아의 보호와 지도 아래 맡기기로 하였다. 이때 조선교회는 박해로 말미암아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1793년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밀사를 북경에 보낼 수 있었다. 구베아는 다시금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1794년에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는 그 해 말에 조선국경에서 지황을 만나, 그의 인도로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 초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얼마 동안 조선말과 풍습을 익힌 다음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으나, 곧 배신자의 고발로 그의 입국사실이 관헌에 알려지고, 간신히 피신할 수는 있었지만 관헌의 수색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과 교리연구, 복음전파를 위한 명도회(明道會)의 조직과 회원들의 성공적인 전교활동, 특히 초대 회장 정약종(丁若鍾)과 황사영(黃嗣永)의 지도,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등 여교우들의 헌신적인 활동 등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 명에 불과하였던 신자수가 6년 사이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조선교회를 거의 폐허상태로 만들었다. 한 사람뿐이던 선교사와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서도 교회는 10년 만에 재기할 수 있게 되어 다시금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811년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북경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면서 선교사의 조속한 파견을 간청하였다.
이때 그들은 선교사의 파견만이 아니라 파견된 선교사의 체류보장까지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선교사 파견과 선교사의 체류보장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북경교구에서는 당시의 사정으로 인하여 단 한 명의 선교사도 파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선교인들은 1824년에 다시금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직접 보냈다.
이 서한에 접한 포교성성은 더 이상 북경교구에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조선교회 문제해결에 직접 관여하기로 결정하여, 1827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조선교회를 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외방전교회측은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과 조선입국의 어려움 등의 이유를 들어 조선교회 수락을 주저하였다.
이때 이 회의 회원이면서 당시 샴교구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B.)가 조선선교사를 자원하고 나섰으므로, 교황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1831년 9월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다.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지만, 조선국경까지 도달하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을 고난 속에서 허송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북경교구 선교사들의 방해가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조선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됨으로써 포르투갈 보호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중국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1836년 이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에 주교 앵베르(Imbert, L. M. J.)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1백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즉, 1785년(정조 9) 봄 당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초기 신자들이 형조에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벌어졌는데, 양반의 자제들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유배형을 받고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김범우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 숨짐으로써 한국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처형을 당하였는데, 모친상을 당하고서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해서 홍낙안(洪樂安)·이기경(李基慶) 등 공서파(攻西派)의 남인 신서파(信西派)에 대한 공격은 더욱 심해져 이승훈·권일신·최필공(崔必恭) 등 10여 인이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사형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1795년의 을묘박해는 주문모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주문모는 피신하고 그 대신 최인길·윤유일·지황 등 3인이 포청에서 사형을 당하였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 등이 좌천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써 서울에서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일단락되었으나, 지방에서의 박해는 계속되어 특히 호서지방과 경기도의 양근·여주지방에서 박해가 심하였다.
그러나 정조 때의 박해는 정조의 온화한 성격과 교화정책 때문에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정학(正學)인 유학(儒學)을 천명하면 사설(邪說), 즉 천주교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다시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득세한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는 그 해 1월 10일 정순왕후(貞純王后) 대왕대비 김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자 척사윤음(斥邪綸音)으로 끝나게 되는데, 크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인 동시에 남인의 지도급 인사로 간주되고 있는 이가환·권철신·이승훈·최필공·홍낙민·정약종·홍교만(洪敎萬) 등의 사형이다.
사형된 사람들 중 이가환은 원래가 천주교인이 아니었고, 이승훈은 전에 배교한 사실이 있음에도 사형을 당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박해가 정치적 보복의 색채가 농후함을 알 수 있다.
둘째 단계는 신부 주문모의 순교이다. 그에 대해서는 한때 청나라로 송환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끝났고, 여기에 연루되어 강완숙 등 여교우들도 많이 참수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황사영의 순교이다.
황사영의 체포로 백서사건(帛書事件)이 확대되어 관련자가 처형되는 동시에, 봄에 갇혔다가 풀려난 정약전·정약용 등 남인의 거물들이 다시 잡혔으나 백서와 관련된 사실이 없었으므로 유배로 끝나고, 황사영만은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되었다.
황사영의 처형으로 박해는 점차 수그러져 정부에서는 우선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진주사를 청나라로 보내 박해가 불가피하였음을 설명하였고, 이어 박해의 종말을 고하는 척사윤음을 전국에 선포하여 박해행위를 변호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과 전주에 수감되어 있는 천주교인들의 처형을 서둘러, 가혹하였던 박해는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두 번의 박해가 일어났는데, 1815년(순조 15)의 을해박해는 신유박해 때 피신한 교인들을 상대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자행되었고, 1827년의 정해박해는 경상도 일부와 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헌종 때 두번째의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교인의 후예들이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사 영입운동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1836년 이래 주교와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써 천주교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는데, 1839년(헌종 5)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해 3월 5일에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발표되어 당시 입국해 활동하던 3인의 선교사가 모두 순교하였고,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조신철(趙信喆) 등 교회의 중요 인물이 모두 순교하였는데, 특히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미리 재상에게 제출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0월 8일 ‘척사윤음’이 선포되어 세 번의 사형집행을 끝으로 이번 박해도 막을 내렸다.
1846년의 병오박해는 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체포가 발단이 되어 김대건과 남녀 교우 9인이 순교하였는데, 그 중 현석문(玄錫文)은 기해박해 이래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기해일기(己亥日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해박해 이후 성직자 없는 교회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1860년(철종 11)의 경신박해는 교회측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 관변측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아마도 박해의 주동자가 조정이 아니고 포도대장이 자의로 일으킨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과 탐욕에서 박해를 일으켰고, 국민의 여론과 정부가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포도대장직을 사임해야 했고, 그래서 박해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 등으로 보아 과거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박해의 장본인은 흥선대원군이었는데 그는 초기에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남침야욕을 막기 위해 주교 베르뇌(Berneux, S. F.)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박해자로 돌변한 이유는 1860년(철종 11)의 북경함락사건에 이어 양인학살(洋人虐殺) 사실이 조선에 전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기까지 근 10년간 계속되었는데, 크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
병인년 초에 주교 베르뇌의 체포로 시작되어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중이던 선교사 12인 중 9인과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정의배(丁義培)·최형(崔炯) 등 교회의 지도층 평신도들이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3인의 선교사 중 신부 리델(Ridel, F. C.)은 조선을 탈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P. G.)에게 조선교회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로즈는 조선에 대해 군사적 보복을 결심하고, 두 차례에 걸쳐 군함을 이끌고 한강과 강화도에 나타나 선교사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이것이 병인양요로, 이로 인해 박해는 재연되었고, 특히 대원군은 프랑스함대가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였다고 해서 천주교인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인근 양화진(楊花津, 일명 切頭山)을 새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선참후계형식(先斬後啓形式)으로 천주교인을 무수히 학살하였다.
제3단계는 1868년 오페르트(Oppert, E. J.)에 의해 자행된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계기로 박해가 재연되었는데,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신부 페롱(Feron,S.)과 일부 천주교인이 이 일과 관련되었다고 해서, 해미지방(海美地方)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천주교인이 희생되었다.
그 뒤 1876년에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곧 체포되었으나, 주교 리델과 드게트(Deguette, V.)는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는 것으로 박해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상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부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로 낙인을 찍고, 천주교도들을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이 밖에 유교의 배타주의는 유교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단시했고, 조선왕조는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에 입각해서 정치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가 혼동됨으로써 잦은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혼동은 당쟁과 세도정치에도 파급되어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종교를 구실로 삼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더구나 천주교도들의 성직자 영입운동과 종교자유를 획득하고자 한 운동은 쇄국양이주의(鎖國壤夷主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역적으로 가차없이 처단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렇게 여러 번의 박해를 계속 받음으로 해서 처음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계급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신앙관을 바탕으로 영적 구원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처음 사회를 개혁해보려던 강한 의욕은 사라지고 현세도피적이고 내세구원적인 신앙으로 변천되어갔다.
또한,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하여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철종조로 접어들면서 천주교는 비교적 평온을 누려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세도정치의 주인공인 안동 김씨는 시파(時派)로,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므로 천주교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많은 교회서적을 인쇄하여 보급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한편 복음을 더욱 널리 전파시켜 나갔다.
1882년(고종 19)에 미국을 비롯한 구미(歐美) 여러 나라들과의 조약, 특히 1886년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은 불완전하나마 조선에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프랑스인의 자격으로 개항지에 정착하여 토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증명서였던 호조(護照)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선교사가 한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 뒤 본당의 조직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고, 개항지 밖으로는 정착이 허용되지는 않았으나 선교사들은 이에 구애됨이 없이 지방에도 정착하여 본당을 건설해나갔다.
최초의 본당인 서울의 종현본당(鐘峴本堂: 현재의 명동)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되자 종현언덕에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수녀원 등의 부속시설에 필요한 대지를 마련하고, 우선 대성당건축을 위해 정지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한성부에서 갑자기 종현대지의 소유권을 억류함으로써 ‘종현기지분쟁’을 야기시켰다.
3년간 계속된 분쟁은 결국 교회의 승리로 끝나 비로소 대성당건축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종현에 이어 이리·원산·제물포·부산·마산·목포 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건설되고, 개항지가 아닌 갓등이와 평양과 같은 지방 주요 도시에도 본당이 건설되었다. 본당의 건설과 더불어 성당들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또한 성당건축이 발전하게 되었다.
즉, 1892년에는 약현본당(藥峴本堂: 지금의 중림동)에 최초의 고딕양식의 벽돌 성당이 세워졌으며, 6년 후에는 같은 양식의 웅장한 종현 대성당이 준공되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제7대 교구장인 주교 블랑(Blanc, J.)은 종현구내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프랑스로부터 수녀들을 초청하였고, 이 무렵 용산에는 신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제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거나 또는 낙후되었던 지방에까지, 즉 남으로는 제주도에서 북쪽은 간도지방에까지 복음이 미치게 되었다.
특히, 황해도는 이 시기에 개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곳으로, 1895년까지만 해도 본당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3년 사이에 4개의 본당이 서게 되고, 선교사가 처음으로 황해도에 부임했을 때 6백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6년 사이에 약 10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반면에 필연적으로 정부, 특히 지방당국과 잦은 마찰을 빚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이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사건들이다. 교안이란 지방관리와 지방의 선교사, 지방민과 지방의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조선과 프랑스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을 말한다.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교회의 당면과제는 조선인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선교사를 위해서는 개항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지구입과 건축을 통해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획득하려는 투쟁과정에서 자연 교안이 수없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잡다하여 그 중에는 일부 선교사와 지방관리의 월권, 일부 교인과 주민들의 사리사욕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축교안(辛丑敎案)과 해서교안(海西敎案)이었다. 거기에는 정부나 교회가 다 같이 반성해야 할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교민조약은 1899년(고종 36) 조선교구장인 주교 뮈텔(Mutel, G.)과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체결되어 비로소 한국인에게도 신교의 자유가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지방 본당에서의 선교사들의 정착권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개화기에 천주교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 천주교에서 발간한 순한글의 주간지 『경향신문(京鄕新聞)』은 1906년에 창간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간 지속되었는데, 국권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른 시기에 내적 개화를 강조하면서 국민을 자강운동으로 계몽하고 인도하였다.
천주교의 교육사업은 처음에 국민교육과 기초교육에 치중하였는데, 1909년부터는 독일의 분도회(芬道會)를 초대하여 서울에 사범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일제와 일본인들의 교육 독점으로 폐교되었다.
일제하에서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비록 국권수호운동과 독립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평신도들은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독실한 천주교신자인 안중근(安重根)의 의거는 국권수호운동의 대표적인 실례로 손꼽힌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서상돈(徐相敦)도 열렬한 천주교신자였다. 안악사건(安嶽事件)에도 안명근(安明根)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이 참여하였고, 105인 사건에도 관련이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교회당국의 절대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앞장섰으며, 황해도 은율(殷栗)의 신부 윤예원(尹禮源)을 비롯해서, 강화(江華)·광주(廣州) 등지에서는 천주교인이 만세시위의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하여 당시 서울·원산·신의주·평양·공주·대구 등지의 감옥에는 53인의 천주교 신자가 투옥되었고, 해외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교인들도 적지않았다.
일제의 종교탄압은 해를 거듭할수록 노골화되어 앞에 말했던 『경향신문』이 끝내는 폐간되었고, 사범교육기관인 숭신학교도 폐교당하였다. 그 뒤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포교를 은연중에 제재하였고, 교회학교의 종교교육까지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해 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교인들에게 이를 거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에 있는 주교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해석하였고, 이를 근거로 하여 교황청이 신사참배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 뒤 천주교인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이에 응한 것은 아니고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직장에서 추방되거나 투옥된 사례도 적지않았다.
더구나 일제는 1940년대에 이르러 외국인 교구장을 일본인 교구장으로 대치시키고 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였으며, 기타 외국인 선교사들을 구금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교구는 크게 발전하여 1911년에는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었고, 동시에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되었다. 1920년에는 원산교구, 1927년에는 평양교구, 1928년에는 연길교구, 1937년에는 전주교구와 광주교구, 1939년에는 춘천교구가 창설되었다. 1940년에는 원산교구가 폐지되고 대신 덕원(德源) 면속구(免屬區)와 함흥교구가 설정되었다.
교구의 설정으로 새로운 선교단체가 진출하게 되는데, 이미 교육사업을 위해 한국에 진출했던 분도회는 원산교구를 담당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진출한 미국 메리놀선교회는 평양교구를, 1930년대에 진출한 아일랜드의 룸바노외방전교회는 광주와 춘천교구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새로 설정된 전주교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짐으로써 처음으로 방인교구(邦人敎區)가 탄생하였으며, 이어 서울교구장직이 한국인 신부 노기남(盧基南)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였다.
민족의 광복과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에게도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광복 직후의 민족사는 교회의 기대대로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광복은 되었으나 정부는 수립되지 못한 채 3년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천주교는 개신교와 더불어 우대를 받으며 교세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즉, 언론·출판 분야에서 『경향신문』이 창간되고,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이 속간되었다. 『경향신문』은 한말의 『경향신문』의 제호를 이어받았으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 속간은 아니었다. 교육사업으로는 종래의 초등기관들이 중·고등교육기관으로 개편되었고, 또한 성직자 양성기관인 신학교가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승격되었다.
교회조직면에서는 충청남도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대전교구로 독립,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수도회로는 최초의 방인 여자수도회로써 복자수녀회가 창설되고, 샤르트르의 바오로수녀회가 일본관구에서 분리되어 독립관구로 승격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에 교황사절이 부임하였다.
천주교는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총선거에 대비하여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 신자와 청년들을 단합시키는 한편, 교구장들은 연합교서를 발표하여 신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특별기도와 희생을 당부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도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를 계속하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해 순교정신으로 대항하도록 권고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간접적인 투쟁선언을 의미한다. 당시 천주교는 남한의 좌익분자들과 투쟁을 계속하면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교회학대에 대해 결사적으로 항거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에 못지않게 국내의 사회부조리의 제거가 조국통일의 전제조건임을 역설하였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결과적으로 북한 교회의 전멸을 초래하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부터 토지개혁·화폐개혁을 거쳐 점차 종교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6세 때부터 종교를 밝혀야 하였고, 종교가 드러나면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더구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종교말살정책이 노골화되고 본격화되었다.
1949년 5월 공산주의자들은 덕원의 분도회수도원을 습격하고, 그 곳에 있던 주교 사우어(Sauer, B., 辛神父)를 비롯하여 함경남북도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 신부·수사·수녀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교구의 주교 홍용호(洪龍浩)가 항의하고 나섰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그를 체포하는 동시에 평안남북도의 모든 한국인 신부들까지도 체포하였다.
또한 황해도와 강원도에 남아 있던 신부들도 6·25전쟁을 전후하여 모두 체포되어 북한에는 한 명의 신부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한편, 남한의 천주교는 6·25전쟁의 시련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하였고 휴전 후에는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휴전 당시 16만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1962년에는 53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1962년은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고, 또한 이 해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한국교회의 발전과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자립교회로 승격함으로써 교구가 많이 증설되는 등 발전을 이룩한 반면, 제2차 공의회 결과로 교회의 미사는 모국어로 집전되고 전례와 예식이 종전과는 달리 대단히 간소화되었으며, 평신도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갈라진 형제들과의 대화·기도회 등이 빈번해졌으며, 신구약 성서가 공동으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바티칸공의회는 이렇듯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교회 안의 사회참여의식이 고조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경제제일주의에서 비롯된 인간경시·황금만능의 풍조, 각종의 사회부조리와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에 입각해서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등,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교계제도의 설정과 공의회는 한국교회의 발전을 가속화시켜 19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에 서임되는 결실을 가져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스스로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1981년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기념과, 이어 1984년 교회창설 2백주년 기념을 연이어 맞게 되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4년 5월 초에 한국천주교 2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2백주년을 맞는 한국천주교회를 축복하였고, 이어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있게 한 순교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여 그들을 모두 성인품(聖人品)에 오르게 하였다.
103위 성인 중에는 10명의 외국인 선교사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순교한 자들이므로 당연히 한국교회에 속하는 성인으로 시성된 것이며, 나머지 93명은 한국인으로 순교한 사람들이다.
순교시기로 구분하면,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가 정하상·유진길 등을 포함하여 모두 67명이고, 1846년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가 김대건을 비롯하여 모두 9명,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는 남종삼 등 모두 합해 17명이다.
이들 중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는 이미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으며,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는 1968년 10월 6일에 로마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인데, 한국 천주교회는 성인을 배출함으로써 세계만방에 한국 천주교인의 영광을 빛냈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해외선교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한국외방선교회에서 파푸아뉴기니아에 4명의 신부를 파견한 것을 시발로 하여, 현재는 대만, 필리핀, 파푸아뉴기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페루 등의 나라에 한국인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어 한국천주교회를 세계천주교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천주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위해 북한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주로 부각되었던 사회정의와 사회복지의 신장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전통적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에서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을 새로운 과제로 부여받고 있다.
1968년 4월 27일 제5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이래 한국천주교회의 최고 장상으로서 교계 내외에서 존경과 신망을 받던 김수환 추기경이 퇴임함에 따라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대주교가 1998년 6월 29일 제13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였다. 정진석 대주교는 2006년 2월 추기경에 서임되는 영예를 안았다. 2012년 5월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났으며, 같은 해 6월 염수정 대주교가 제14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염수정 대주교는 2014년 2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세 번째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2022년 5월 29일 유흥식 대주교가 서임되어 한국인으로는 네번째 추기경이 되었다.
2013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천주교회의 총 신자수는 544만 명 정도이며, 교구수는 서울·인천·수원·의정부·춘천·원주·대전(이상 서울관구,) 대구·부산·마산·안동·청주(이상 대구관구), 광주·전주·제주(이상 광주관구) 등 15개 교구가 있으며, 그 중 서울·대구·광주의 3교구는 대교구이다.
본당수는 1,051개, 공소는 1,242개이고, 신부는 2,538명(외국인 221명포함)이며, 수도회는 모두 127개로서 39개의 남자 수도회에 소속된 수사가 1,095명, 88개의 여자 수도회에 소속된 수녀는 7,574명이다.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교육기관으로는 가톨릭대학교를 비롯하여 대학교가 10개교, 전문대학 1개교, 고등학교 37개교, 중학교 28개교, 초등학교 6개교가 있으며, 그 밖에 많은 특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의료사업으로는 성모병원을 비롯해서 종합병원 20개소, 의원 15개소, 의료연구소 8개소, 무료병원 11개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밖에 사회사업으로는 수많은 양로원·고아원·요양원·나환자수용소 등을 세워 불우어린이와 노인 및 근로여성을 보살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