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첫째 아들인 왕자이다. 1612년(광해군 4)에 태어나 1645년(인조 23)에 사망했다. 병자호란으로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자진해서 봉림대군 등과 같이 심양에 인질로 갔다. 심양에서 9년 동안 생활하면서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했다. 서양문물 수용에도 적극적이어서 귀국할 때 관련 서적과 물자들을 가져왔다. 이는 조정의 부정적 평가를 불러왔고 급기야 부왕과 갈등을 빚다가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에 급서하고 가족들도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왕(李炡).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인조 3)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참의(參議)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 · 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인조 20) 3월과 1644년(인조 22)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 · 수학 ·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 · 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다. 또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로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 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자는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소현세자는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 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 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인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사후 소현(昭顯)으로 증시(贈諡)되었으며, 이식(李植)이 묘지(墓誌)를 썼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