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대흥(大興: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출신. 1632년(인조 10) 침술이 탁월하다 하여 내의원(內醫院)의 추천으로 서울에 초청되었다.
인조 11년부터 27년, 왕이 붕어할 때까지 빈번히 번침(燔鍼)을 실시하여 효험이 있자 특명으로 현령에 임명되기도 하고 의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번침법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략 침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을 불에 달구어 사용하는 방법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이 번침술은 당시로서는 사술(邪術)이라 하여 배척과 비난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치의를 역임하였으나 세자가 죽자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여러 차례 그의 죄를 논하고자 장계가 올라왔으나 임금은 이를 따르지 않았을 정도로 인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1649년 인조가 붕어하자 그 책임을 물어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갔으나 2년 후 왕대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병후가 위독하여 특명으로 석방되어 다시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