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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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경적(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 · 인신(印信 : 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이칭
이칭
교서감(校書監), 운각(芸閣), 외각(外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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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경적(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 · 인신(印信 : 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내용

일명 교서감(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1392년(태조 1)에 교서감(校書監)이라는 칭호로 처음 설치했다가 1401년(태종 1)에 교서관으로 고쳤다. 관원은 모두 문관을 쓰며, 전자(篆字)에 익숙한 자 3인은 그 품계에 따라 겸임시켰다.

판교(判校) 1인은 타관이 겸하였고, 교리(校理) 1인, 별좌(別坐)·별제(別提) 합 4인, 박사(博士) 2인, 저작(著作) 2인, 정자(正字) 2인, 부정자(副正字) 2인의 관원과 사준(司準) 10인 등의 잡직과 서리(書吏)·전령(傳令) 등 20여인이 있었다. 세조 때 전교서(典校署)로 개칭되고, 1484년(성종 15) 환원되어 『경국대전』에는 뚜렷한 관서로 되었다.

그러나 1777년(정조 1)에 규장각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건의에 의하여 규장각에 편입하였다. 규장각을 내각(內閣)이라 하고, 속사(屬司)가 된 교서관을 외각(外閣)이라 하였다. 외각의 장격인 제조(提調)에는 내각제학이, 부제조에는 내각직제학이, 교리에는 내각의 직각(直閣)이 겸임하여, 내각의 주도 아래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규장각고(奎章閣考)」(김용덕, 『조선후기사상사연구(朝鮮後期思想史硏究)』, 을유문화사, 1977)
집필자
김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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