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현지(顯之), 호는 신안(新安). 산청 출신. 강흥국(姜興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행(姜行)이고, 아버지는 강문회(姜文會)이며, 어머니는 김윤(金允)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왕으로부터 『중용(中庸)』 1권을 하사받았다. 151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기사관 · 정언 · 사서를 거쳐 1524년 문학 · 지평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간사(奸邪)를 논핵하는 대간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자 극언하는 소를 올려 외지로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듬해 전라좌도어사로 나갔으며 교리 · 부응교 · 헌납 · 응교 등을 거쳐, 1526년 재해가 휩쓴 평안도에 순어사(巡御使)로 파견되었다.
1530년 종부시정으로서 충청도어사로 나갔으며, 1532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대사성 ·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37년 승지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8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성주사고(星州史庫)에 화재가 나는 등 여러 가지 사건으로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아 이듬해 체직되었다가 곧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542년 형조참판이 되었는데, 전에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많은 관인(官人)들을 개인적인 일에 부렸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4년 판결사 · 내의원제조를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 · 한성부좌윤을 거쳐 1551년(명종 6)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혜평(惠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