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좌윤, 경연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현지(顯之)
신안(新安)
시호
혜평(惠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86년(성종 17)
사망 연도
1553년(명종 8)
본관
진주(晉州)
출생지
산청
주요 관직
이조참의|동지춘추관사|형조판서|한성부좌윤|경연특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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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좌윤, 경연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현지(顯之), 호는 신안(新安). 산청 출신. 강흥국(姜興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행(姜行)이고, 아버지는 강문회(姜文會)이며, 어머니는 김윤(金允)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왕으로부터 『중용(中庸)』 1권을 하사받았다. 151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기사관 · 정언 · 사서를 거쳐 1524년 문학 · 지평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간사(奸邪)를 논핵하는 대간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자 극언하는 소를 올려 외지로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듬해 전라좌도어사로 나갔으며 교리 · 부응교 · 헌납 · 응교 등을 거쳐, 1526년 재해가 휩쓴 평안도에 순어사(巡御使)로 파견되었다.

1530년 종부시정으로서 충청도어사로 나갔으며, 1532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대사성 ·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37년 승지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8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성주사고(星州史庫)에 화재가 나는 등 여러 가지 사건으로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아 이듬해 체직되었다가 곧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542년 형조참판이 되었는데, 전에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많은 관인(官人)들을 개인적인 일에 부렸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4년 판결사 · 내의원제조를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 · 한성부좌윤을 거쳐 1551년(명종 6)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혜평(惠平)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집필자
김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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