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 · 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 · 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 · 대사성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 · 부제학 · 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대사헌 · 좌부빈객(左副賓客)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천문 · 지리 · 의술 ·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 신흠(申欽) ·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 · 『계곡집』 ·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