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승문원판교 장옥(張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 장임중(張任重)이고, 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이며, 어머니는 성자제(成子濟)의 딸이다. 우의정 장유(張維)의 아버지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예조정랑으로 돌아왔다. 선천군수로 있을 때에는 평안도 목민관으로는 으뜸가는 치적을 남겼다.
장령을 거쳐, 1591년 양양부사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일당이라 하여 온성으로 귀양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망혜령(芒鞋嶺)을 넘어 왕을 호종하였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고, 이듬해 집의로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도승지·해주목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조판서로서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영접하고, 그와 함께 울산싸움에 참전하였다. 뒤에 형조판서가 되었고, 사후에는 영의정의 추증되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