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오(正吾), 호는 잠은(潛隱). 할아버지는 응교 강덕서(姜德瑞)이며, 아버지는 도사 강윤조(姜胤祖)이다.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태조비 한씨의 제릉(齊陵)의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세마에 임명되고 이어 시직(侍直) 부수(副守)로 승진하였다.
이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종향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처음에는 허락받지 못하다가 뒤에 허락을 받았다. 계모 윤씨가 죽자 효행이 지극함을 인정받아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로 경상도 성현찰방(省峴察訪)에 제수되었다.
이 때 그곳에 가축의 병이 크게 유행하여 소가 많이 죽었는데 영동에서 소를 사서 역호(驛戶)의 대소를 헤아려 나누어 기르게 하여 폐농을 면하게 하였으며, 소도 많이 번식시켰다. 그리하여 역졸들은 이 소를 ‘강후우(姜候牛)’라 하였다.
이 공으로 산음현감(山陰縣監)으로 승진하여 선정을 베풀고 임기가 끝나 떠날 때는 이민(吏民) 수천명이 울었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후에는 심장세(沈長世) · 홍우정(洪宇定) · 민양(閔瀁) · 홍석(洪錫) 등과 같이 태백산 춘양동(春陽洞)에 은거하였는데, 이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