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가구(可久), 호는 소전(少痊) 또는 소첩(巢睫). 김광수(金光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희우(金希禹)이고,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김진선(金盡善)이며, 어머니는 민철명(閔哲命)의 딸이다.
1617년(광해군 9) 진사가 되고, 1619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중국어에 능하였으므로 예조좌랑 때 한어교수(漢語敎授)를 겸직하였다.
예조정랑·필선(弼善)을 거쳐 1625년(인조 3)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29년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어 전주 등 다섯 고을에서 직납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 조운(漕運)의 폐를 상소하였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서 장령을 거쳐 1634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이 때, 1617년 생원시의 장원 이영구(李榮久)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상소하면서 함께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연명으로 하였으므로, 김덕승의 이름도 들어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1635년에 다시 장령이 된 뒤 사예(司藝)·상례(相禮) 등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경사 외에도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였고 그림에 능하였으며, 군서(群書)를 연구하여 성력제가(星曆諸家)에도 조예가 깊었다.